다시 민주적 시민상을 묻다
다시 민주적 시민상을 묻다
  • 교수신문
  • 승인 2017.11.2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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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김명석의 필로폴리스 6. 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III

합리적 민주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에 기반해 정치, 경제,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불편부당하게 평가하고 그런 평가에 기초해 선거를 치르는 국가, 그것은 가히 합리성의 유토피아라 할만하다. 그러나 ‘유토피아(utopia)’라는 말 그대로 그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니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국가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유토피아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정치이론가들의 생각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그 단적인 예가 민주 국가의 시민을 호빗(Hobbits), 훌리건(Hooligans), 그리고 벌컨(Vulcans)으로 나누는 제이슨 브래넌(Jason Brennan)의 이론이다. 호빗은 정치무관심층, 훌리건은 정치적 정파성이 강한 정치에 대한 스포츠 팬, 그리고 벌컨은 정치적 정보를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무심하고(disinterested) 냉정한(impassionate) 시민으로 정의된다. 

브래넌의 이론에서 벌컨이라는 범주는 묘하다. 정치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실상 벌컨은 공집합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치에 무지한 정치무관심층인 호빗을 제외할 때, (문빠와 박사모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정치참여형 시민들은 정치적 정보를 합리적으로 소비하기보단 편향적이고 정파적으로 소비하며 또한 다양한 인지심리학적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훌리건이라는 말이다. 경제학자 브라이언 카플란(Brian Caplan)은 그의 저서 『합리적 투표자의 신화(The Myth of Rational Voters)』에서 대다수의 정치참여형 시민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불합리성이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데, 개개인의 비용 대비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애써 합리적으로 정보를 소비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마음껏 탐닉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소비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벌컨이 공집합에 가깝다면 그것은 민주 시민을 분류한다는 애초의 목적에 비춰 유용한 범주라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왜 브래넌은 구태여 그 목적에 비춰 결코 유용하다고 볼 수 없는 벌컨이라는 범주를 도입했을까? 그에 대해 브래넌 자신은 별다른 말을 내놓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합리성의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염원이 남긴 짙은 그림자이지 않을까 싶다. 비록 민주 국가에 벌컨이 존재하진 않지만 (혹은 오직 미미하게만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민주 시민의 규범적 모습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민주주의를 포기해야 할까?

브래넌 자신은 벌컨이 부재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어쩌면 벌컨의 존재가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오는, 그래서 민주 사회는 영원히 훌리건들의 천하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에서 오는 깊은 좌절감 때문인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도 『민주주의에 반대한다(Against Democracy)』이다.

벌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브래넌의 관찰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브래넌의 대응은 틀렸다. 애초 인간이라는 존재가 벌컨이 될 수 없다면 그건 우리가 한탄할 일도 좌절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슈퍼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마도 브래넌은 민주주의를 위해선 벌컨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에겐 벌컨의 민주주의가 마냥 장밋빛만으로 보이진 않는다. 삼인칭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정치적 사안들로부터 객관성의 거리를 두고 냉정하고 불편부당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를 더 민주적으로 더 정의롭게 더 공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아무리 객관적 합리성의 화신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나는 그 주인공이 벌컨이 아니라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흔들림 없는 열의, 관심, 애착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돌보고 보살피는 정치참여형 시민들이라고 본다. 80년 광주의 시민들이 그들이고, 군부 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그들이고, 지난해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 시민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무심하고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적 가치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포기할 수 없는 신념이었고 확신이었다.

그들이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Harry Frankfurt)가 무엇인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이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고 본 의지적 필연성(volitional necessity)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들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그 가치를 양보하는 것이 도대체 불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그러한 ‘무능력’ 혹은 ‘불가능’을 경험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양보하는 능력을 박탈하고,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다. 삼인칭적, 객관적 관점에서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에 필요하다는 논리와 추론 이전에 그들은 이미 그런 민주주의적 가치와 자신을 동일시했고, 나아가 그런 모습을 자신의 진정한 자아(true self)로 받아들이고 긍정하고 그리고 실천했다. 그렇기에 군부정권의 폭압도 엄동설한의 추위도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객관성의 거리를 두고 세계를 무심히 바라보는 벌컨은 이처럼 민주주의적 가치와 자신을 일체화하고 그를 통해 의지적 필연성을 성취하는 일인칭적 실천가, 행위자가 될 수 없다. 벌컨이 민주주의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이다. 벌컨이 민주주의의 주인공이 아닌 만큼 벌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벌컨이라는 공허한 규범적 시민상, 합리성의 유토피아라는 환영일 뿐이다.

분명 합리성은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합리성은 인지심리학 실험실에서 측정되는, 무심한 삼인칭적 관찰자의 합리성이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정치이론가들이 이런 방관자의 합리성 개념을 은연중에 가정하며 벌컨이라는 헛된 환영을 쫓았다는 사실에 나는 탄식한다.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합리성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돌보고 보살피는 이의 합리성이다. 이런 새로운 합리성 개념을 통하여 벌컨을 대체할 새로운 민주적 시민상을 정립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정치이론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 나는 믿는다.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과학철학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철학은 반증사례에 직면해서도 지배적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않는 정상과학적 활동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적 합리성 개념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쿤 이전의 전통적인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 과학철학이나 칼 포퍼(Karl Popper)의 과학철학에서 과학자는 탐구의 대상으로부터도, 그를 예측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구축한 이론으로부터도 어느 정도의 심리적 거리를 둔 무심하고 냉정한 삼인칭적 관찰자로 그려진다. 과학자란 경험적 데이터에 근거하여 과학 이론에 가설연역적 규칙이나 반증주의적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과학관에서 과학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컴퓨터와 같은 기계에 가깝다.

물론 전통적 과학철학자들도 과학 활동에서 과학자의 영감, 창의성, 천재성과 같은 것들의 역할을 부정하진 않는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과학자의 활동에서 과학적 발견이 이뤄지는 발견의 맥락(context of discovery)과 관찰 데이터에 근거해 과학 이론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정당화의 맥락(context of justification)을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지는 발견의 맥락에서 과학자 개인의 창의성이나 천재성이 빛을 발한다는 사실은 아무런 이견 없이 인정한다. 그러나 예술이나 문학과 같은 과학 이외의 영역에서도 개인의 창의성이나 천재성은 요구된다. 그런 개인적 능력은, 비록 과학 활동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인류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 할 수 있는 과학 활동의 본성을 포착하진 못한다고 그들은 본다. 이 대목에서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이 인류의 다른 어떤 활동보다 성공적인 이유는, 과학이 과거의 과학적 성과에 기반하여 누적적으로 진보하는 이유는, 과학이 근대 이후 객관성과 합리성의 정수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발견의 맥락이 아닌 정당화의 맥락에 있다고 천명한다. 그런데 그 정당화의 맥락에서 핵심은 과학자가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꼭꼭 숨기고 과학의 규칙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에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아무런 감정도 애착도 염원도 없이 무심하고 냉정하고 불편부당하게 과학의 알고리듬을 따라 정당화의 맥락에 임하는 과학자, 그런 과학자의 모습이 과학적 합리성의 요체이고, 그런 과학자의 활동 덕분에 과학의 축적적 진보가, 나아가 인류의 진보가 가능했다고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은 역설한다. 한마디로 과학의 진보는 과학계의 벌컨에 의해 성취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과학관은 1960년대 이후 토마스 쿤을 위시한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 폴 파이아벤트(Paul Feyerabend)와 같은 역사적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정치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의 세계에서도 벌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오직 성공의 스토리만을 담고 있는 과학 교과서가 보여주는 과학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는 과학에서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적 신념으로부터 객관성의 거리를 지키는 무심하고 냉정한 벌컨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돌보고 보살피면서 동시에 그러한 돌봄과 보살핌이 합리적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숙고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자였다. 이처럼 쿤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과학철학자들은 기존의 무심하고 불편부당한 벌컨의 과학자상을 대체하는 새로운 과학자상을 정립했고, 그 과정에서 과학적 신념을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의 합리성 개념을 도입하였다. 적어도 그들의 과학철학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렇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과학철학자들의 논의는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정치이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의 영역에서 벌컨이 불가능하다면 정치의 영역에서 벌컨을 찾는 것은 緣木求魚와 다름 아니다. 아울러 쿤과 라카토스 등의 역사적 과학철학자들이 발전시킨 합리성은 우리가 일인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무엇인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의 합리성이라는 점에서 벌컨을 대체할 새로운 민주적 시민에게 요구되는 합리성, 즉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의 합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층 중요한 논점은 기존의 (삼인칭적 관찰자 혹은 방관자의) 합리성 기준에 따라 불합리한 시민으로 낙인 찍혔던 이들 중 일부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 시민으로 재평가될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전 글에서 문재인에 대한 문빠의 지지는 쿤의 과학철학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전략적 지지로 규정한 바 있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논구하겠지만, 그 규정이 유효한 한 그들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 시민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는 삼인칭적, 객관적, 관찰자적 합리성의 기준에서뿐만 아니라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합리성의 기준에서도 비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박사모와 뚜렷한 대비를 이룰 것이다.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최성호 교수는 서울대에서 과학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문화연구센터 수도권 전임 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 전임강사, 호주 시드니대 시간연구소 연구원, 캐나다 퀸스대 철학과 조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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