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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위하여
조르바를 위하여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
  • 승인 2017.11.2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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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올해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사망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그리스 문화부에서는 2017년을 ‘니코스 카잔차키스 해’로 지정해 여러 행사를 벌이고 있다. 또한 지구촌 곳곳에서도 그를 재평가하는 학술대회, 세미나, 토론회, 전시회 같은 크고 작은 행사를 열고 있다.

카잔차키스는 비록 상을 받지 못했지만 무려 아홉 번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56년도에는 알버트 슈바이처의 추천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마지막 순간에 스페인 작가 후안 라몬 히메네스에게 노벨상의 영예를 내주었다. 1957년에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알베르트 태생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에게 단 한 표 차이로 노벨상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뒷날 카뮈는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 문학상 선정위원의 결정이 부당하고 말하면서 카잔차키스가 “자신보다 백배는 더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호메로스 이후 그리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평가받는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통풍이 잘 안 된 답답한 환자 방에 들어가 있다가 싱그러운 오월 훈풍이 부는 시골 들판에 뛰쳐나온 기분이 든다. 마치 그의 고향 크레타 섬에 있는 것처럼 싱그러운 훈풍과 함께 온갖 식물과 나무의 향기와 꽃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비단 냄새뿐만이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하는 온갖 풍경과 파도소리 등이 오감을 자극한다.

카잔차키스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그리스인 조르바』(1946)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 중 하나다. 지금 50여 개 넘는 나라 언어로 번역돼 지구촌 곳곳에서 읽히고 있다. 국외에서나 국내에서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삶의 궤도를 수정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만큼 이 소설은 뭇 사람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그리스인 알렉시스 조르바다. 이 소설의 화자는 조르바를 갈탄 광산의 책임자로 고용해 같이 생활한다. 학식과 지식으로 보자면 화자는 조르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나지만, 인생 경험으로 말하자면 아직 풋내기와 다름없다. 조르바는 비록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식한 노동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온몸으로 세상 경험을 두루 쌓았다. 그래서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화자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화자가 창백한 관념적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조르바는 어디까지나 지혜와 슬기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조르바한테서 배우는 소중한 인생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조바주의(Zorbat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화자는 조르바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르바의 학교에 입학해 위대하고 진실한 문자를 새로 배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조르바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지나친 관념을 배격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생각만 하다 보면 행동이나 실천이 부족하게 마련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설파했지만, 카잔차키스의 주인공은 “나는 행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다. 조르바에게는 백 번 생각보다 구체적인 행동 하나가 훨씬 더 소중하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생각은 한낱 허공의 메아리처럼 공허할 뿐이다.

더구나 조르바주의에서는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무게를 싣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현재의 삶이다. 어느 날 작은 마을을 지나가던 조르바는 아흔 살쯤 돼 보이는 노인 하나가 아몬드나무를 열심히 심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 아몬드 열매를 따 먹겠다고 나무를 심는 것이 그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정말로 아몬드나무를 심고 있는 것인지 묻는다. 그러자 허리가 땅 속으로 기어들어갈 것 같은 노인은 뒤돌아서서 그에게 “젊은이, 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조르바는 노인에게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요”라고 대꾸한다.

조르바는 자신의 보스요 화자인 ‘나’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 두 사람 중 누구 말이 더 맞을까요?”라고 묻는다. 조르바는 화자를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며 “딱 걸려들었구먼! 어디 대답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요”라고 짓궂게 말한다. 조르바가 이렇게 짓궂게 화자를 놀려 대는 것은 화자는 아직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지나치게 관념의 늪에 빠져 행동하기 주저하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볼 때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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