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지능을 프로그래밍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지능을 프로그래밍 할 수 있을까?
  • 김재호 과학전문기자
  • 승인 2017.11.20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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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 197. 인공지능 VS 자연지능
인간의 지능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지능, 인공지능, 자연지능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사진 출처 = https://seda.college/seda-applies-artificial-intelligence-language-learning/
인간의 지능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지능, 인공지능, 자연지능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사진 출처 = https://seda.college/seda-applies-artificial-intelligence-language-learning/

 

인간의 지능을 프로그래밍 할 수 있을까. 최근 인공지능에 대한 논쟁은 강한 인공지능의 인류 공격보단 먼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연 인간의 지능이란 무엇이고, 인공지능을 프로그래밍 해서 자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할 수 있는가? 그동안 비판의 지점은‘지능(혹은 마음)’이라는 것을 규정할 수 없는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지능과 마음이라는 것을 규정할 수 없으면 그 어떤 형태의 인공지능도 고려할 수 없다. 원천봉쇄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위험의 양상은 인간의 지능에서 기인

강한 인공지능의 탄생은 지능의 프로그래밍으로부터 출발한다. 철학자와 공학자들 대부분은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이미 인간의 본성에 숨겨져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 안에 있는 것을 더욱 객관화 하고 프로그래밍해서 최고의 성능을 갖추려는 것이다.

최근 <허핑턴포스트>는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Artificial Intelligence Is Already Here?-It’s Us)’는 소식을 알렸다. 인공지능의 가장 위험한 상황은 이미 도래했는데, 그 양상은 인간의 지능에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자연지능을 위한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자각(awareness itself)’이라는 게 요지다. 이 글은 의학박사이자 베스트셀러작가인 디팩초프라가 썼다.

인간은 자신의 지능이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지능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즉 우리는 기계 부품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통찰과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의 마음은 상당히 인공적이다. 부정적 뉘앙스의‘인공적’이란 표현은 가짜, 생명력 없음, 환상, 기계적이고 임의적임 등을 의미하지만, 인간의 일상은 이와 연관돼 있다.

자기 파괴적 습관 못 벗어나는 인간

인간은 로봇과 같은 행동을 보여줄 때가 있다. 자기파괴적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보자. 담배 하나 끊는 것조차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다. 몸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또한 침략이나 공포, 적대감 같은 원초적인 반응에 굴복하는 경우 우리의 뇌는 생물학적 로봇과 같은 반응을 하는 셈이다. 더욱이, 종교나 정치 이념 같은 완전 독단적인 가치 체계를 만들어낼 때도 인간은 미리 프로그램된 정신적 소프트웨어를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경우에 말이다. 모든 과학기술의 진보에는 파괴를 낳는 전쟁, 환경을 해치는 오염 등 자연에 대한 침략이 따른다. 그 어떤 로봇이나 슈퍼컴퓨터보다 인간의 본성만큼 통제를 벗어나 심각한 문제를 낳는 건 없다.

모든 게 마음으로부터 기인했으면, 앞 사례들에 따라인간의 지능은 분명 인공적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미리 프로그램된, 로봇과 같은 삶에 따르도록 허용하는가? 즉,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간접적 의견, 낡고 낡은 믿음, 고정된 조건, 기계적 반응들을 왜 따르는가? 기술적 측면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히 좀 더 나은 논리 기계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적 측면에서 인공지능은 ‘자연지능’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된다. 자연지능을 제거하고 남는 것들은 인공지능이 될 터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어리석음, 불화, 스스로 불러온 문제들이 극복돼야 할 시급한 사안들이다.

남는 건 원초적 ‘경험’ 뿐

새 출발을 위해선 인류를 힘들 게 하는 기존의 모든 인공적이고, 독단적인 설정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삶의 가장 원초적인 측면인 ‘경험’ 뿐이다. 인간은 수많은 경험을 하지만 경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정하긴 쉽지 않다.

경험의 몇 가지 측면을 고려하면, 첫째 경험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반복한다. 둘째, 경험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모른다. 경험은 예측 불가능하고 이로 인해 통제가 안 된다. 물론 기계적인 경험은 예측 가능하다. 셋째, 삶의 연속성을 담지하기 위해 인간은 현실의 시뮬레이션을 설정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시뮬레이션에서 인간의 뇌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 인간 사회를 만들었다. 다섯 가지 감각에 기반해, 일상을 지각하고 해석하며, 이에 따라 누구나 동의하는 이야기가 형성된다. 이 현실의 시뮬레이션은 굉장히 독단적이며 그 바닥엔 거대한 순환의 고리가 깔려 있다.

현실의 시뮬레이션과 순환의 고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자각뿐이다. 생각은 자각의 발현으로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자각보다 더 큰 정신적 작용, 즉 기억, 이론, 모델, 철학, 종교, 기술, 역사에 인간은 정박하려고 하지만 불안정할 뿐이다. 현실에서 삶은 의식 자체, 즉 자각일 뿐이고 자각은 지속적이고 불안정하지 않다. 매일 밤잠에 들 때, 경험들을 사라지지만 자각은 남는다. 잠자는 중에도 뇌와 중추신경계는 활동하고, 모든 세포는 꿈틀거린다. 경험의 밑에 깔려 있는 의식과 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이 만들어낸 에덴동산

인간이 인간의 생각으로 환원된다는 믿음은 인간지능에 대한 가장 인공적인 주장이다. 마음이 만들어낸 에덴동산으로 돌아간다면 인간은 여전히 환상에 사로잡힐 뿐이다. 자각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며, 존재의 토대가 되는 상태이며, 완벽한 자연적인 삶 혹은 자연지능을 위한 희망이다.

한편, 튜링테스트를 통과해, 1997년에 우승한 캐서린(CATHERINE)은 놀랍도록 집중적이고 지능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심판이 빌 클린턴에 대해 이야기한 경우였다. 2014년 튜링테스트에서 우승한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은 13살배기 우크라이나 소년의 인격이 부여됐다. 그래서 심판들은 구스트만이 잘못된 대답을 해도 언어와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대화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통계적으로 분석해 사람 같은 대화를 하려는 클레버봇(CLEVERBOT)도 사실 인간이 프로그래밍한 결과다. 엉뚱한 질문이나 예상되지 않는 대답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다. 가장 최첨단의 대화로봇들조차 인간의 의식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기술적 난관을 뚫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자연지능, 즉 자각과 의식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일이다. 여전히 요원하지만 말이다.

인공지능이 창의성을 발현하는 건, 인간의 자연지능의 측면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자연지능은 자연적이고 독창적이다. 자연지능은 진화의 산물이고, 인공지능 역시 진화적인 프로그래밍을 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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