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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마을'
'고슴도치의 마을'
  • 최익현 편집국장
  • 승인 2017.11.17 1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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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최익현 편집국장
최익현 편집국장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오는가 /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 잠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최승호 시인의 『고슴도치의 마을』(1985) 시집에 수록된 「마을」이란 시의 일부다. 시의 첫 연은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어하는 시적화자의 소망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연은 좀더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단계로 진입해서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 돌담을 높이 쌓는다 /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 문풍지 우는 긴 겨울 밤엔 莊子를 읽으리라”고 어떤 판단에 이른다.

예정대로였다면, 11월 16일 ‘수능’이 치러졌고 시험을 마친 아이들은 햄버거나 아이스크림을 ‘수험생 할인’ 적용받아 좀더 싼값에 먹으면서, 고단했던 12년을 풍선처럼 날려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버렸던 노트를 다시 뒤져 찾아내는 부산한 모습도 없었을 것이다. 2017년 11월 15일 오후에 발생한 ‘포항 지진’은 그렇게 한국 대학입시 풍경 전체를 뒤바꾸고 말았다.

여진의 피해를 우려해 수능을 한 주 미루겠다는 정부 발표가 나오자 “당연한 결정이다. 잘 했다”는 반응, “어떻게 준비해왔는데 미루나”라는 떨떠름한 반응이 뒤섞였다. 수능 연기 결정으로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쪽은 고3 수험생들일 것이다. 그들에겐 여전히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이런 가운데 피해지역인 포항의 고3 수험생들 일부는 수능 공부대신 ‘자원봉사’에 나섰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런데 볼썽사나운 일은 SNS와 일부 보수 언론에서 터져 나왔다. 수능이 연기된 게 포항 학생들 때문이라는 비방이 SNS에 나돌고 있다. ‘포항 생각하면 수능 연기가 맞는데… 59만 수험생 대혼란’, “지진 직격탄을 맞은 경북 포항 지역 수험생 6098명의 불안은 극에 달한 상태” 등의 기사도 눈에 들어온다. 한마디로 포항 사정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수능 연기하는 건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지진은 천재지변이다. 실제 수험 장소로 지정된 학교들에서 적잖은 피해가 확인됐듯, 시험보다는 생명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지난 2014년 4·16 대재난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일주일 뒤에도 재난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냐’는 둥 일부 교사, 학생들의 불만을 전하면서 ‘수능 연기’를 정치적 문제로 몰아가는 일부의 행태는 누가 봐도 정당하지 못한 처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문제되는 건 SNS상의 비방들이다. 수능이 연기된 게 포항 학생들 때문인 것처럼 비난하는 목소리에서 어떤 ‘혐오’의 흔적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김종갑 건국대 교수는 “혐오가 정치적인 이유는, 세상을 혐오하는 주체와 혐오스런 대상으로, 즉 우군과 적군으로 갈라놓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혐오는 몸이 마비될 정도로 강도가 높고 격한 반응을 유발한다. 다른 감정이 잔잔한 물살이나 파도라면 혐오는 쓰나미처럼 격하게 몰려온다.” 그렇다. 재난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한없이 약한 존재들인데, 이걸 다시 彼我로 구획하는 어떤 기제가 작동한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모질다는 뜻일 것이다.

최승호 시인의 「마을」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라는 구절이다.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공동체’가 고슴도치의 마을인 이유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우고 있어서다. 고슴도치가 아닌 우리의 온몸에 가시바늘이 자라나, 서로를 아프게 찌르고 다치게 한다. 한밤 중에 상처 입은 자의 잠은 그래서 불안해진다. 재난 앞에서 우리의 말이, 언어가, 행동이 좀더 겸허해지길 바라는 이유다.

최익현 편집국장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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