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캠퍼스 달군 철학자들의 토론…촛불혁명 이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고즈넉한 캠퍼스 달군 철학자들의 토론…촛불혁명 이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 교수신문
  • 승인 2017.11.1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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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연구회 추계학술대회 참관기

‘한국사회에 대한 철학의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4일에 열린 철학연구회(회장 최신한, 한남대) 추계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대회가 열린 이화여대의 교정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주말의 캠퍼스는 젊은 학생들의 활기가 없어서인지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불과 1년 전 비슷한 시기에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야 했던 상황을 생각하니 隔世之感이 느껴졌다.

촛불을 들었던 철학자들은 다시 연구실로 돌아갔고, 1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 드리는 몇 가지 제언을 가지고 학회장에 모였다. 촛불혁명은 성공적이었고, 우리는 모두 그 성공을 다행스러워하며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대회를 주최한 철학연구회는 그 동안 독자적인 철학적 이론과 관점을 통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해 숙고하고, 의미 있는 글을 발표해 온 다섯 명의 철학자를 발표자로 선정해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디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제언토록 했다. 발표자들은 촛불혁명의 철학적 의미를 논구하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각자의 관점에서 제시했다. 비록 대회장은 넓지 않았고 모인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 어떤 화려하고 떠들썩한 대회보다 뜻 깊은 자리였다는 생각이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주장과 담론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고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간략히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메리토크라시적인 유교 전통의 성과

첫 번째 발표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구축해 온 장은주 영산대 교수(정치철학)가 맡았다. 「유교적 근대성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제목의 글에서 장 교수는 우리 사회가 이룬 민주주의적 성취는 메리토크라시적인 유교 전통의 성과로 볼 수 있지만, 메리토크라시 이념은 세습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에 극복의 대상이라고 진단했다. 장 교수는 유교적 賢能政治가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이 될 수는 없으며, 메리토크라시에 의해 배제된 우리 사회의 약자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주권성을 확보해 줄 ‘시민의회’의 도입, 복지 강화, 민주시민 교육의 강화 등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장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의 주체는 유교적 군자의 민주적 후예로서 서구적인 시민들과는 정체성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좌파는 노동계급 중심의 진보 정치에 대한 환상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한국적 시민의 성숙한 민주적 잠재력에 기대는 ‘시민적 진보’의 길만이 대안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발표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기본소득에 관해 연구하고 그것을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으로서 주장해 온 곽노완 시립대 HK교수(사회철학)가 맡았다. 「한국에서 스마트공유도시와 기본소득의 경제철학적 비전」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서 곽 교수는 오늘날 제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스마트도시의 철학적 쟁점을 다뤘다. 곽 교수는 스마트도시를 통해 시민의 민주적인 권한이 강화될 수도 있지만, 거기에 적용된 정보통신기술들이 감시 및 통제 수단이 되거나 스마트도시 자체가 기업들의 새로운 이윤추구의 장이 될 위험이 있다고 진단하면서, 스마트도시에 관한 논의가 공유경제에 관한 논의와 결합될 때 긍정적인 민주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곽 교수는 만물인터넷 인프라에 기초한 수익성 있는 플랫폼기업을 창설하고, 시민들이 프로슈머로서 그 기업에 투자할 뿐 아니라 그 이익을 시민 모두가 기본소득으로 배당받는다면 새로운 형태의 공유경제모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빠’는 ‘과정으로서의 우리’

세 번째 발표는 일간지의 컬럼리스트로, 또 시민대학의 강연자로서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해 온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과)가 맡았다. 「광장과 의회의 교차로에 선 문빠」라는 제목으로 발표에 나선 박 교수는 젊은층이 주로 사용하는 인터넷 용어들과 학술적 용어들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촛불혁명 이후의 한국의 정치현상을 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대회장을 뜨겁게 달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자를 일컫는 인터넷 용어인 소위 ‘문빠’에 대해 박 교수는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병적인 징후이기는커녕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건강한 대의민주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정당정치와 의회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토의정치가 결사체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형식으로 강화돼야 하는데, ‘문빠’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봤다. ‘문빠’는 생활의 정치화와 정치의 일상화를 통해 자본의 정치화와 정치의 관료화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원용해 ‘문빠’룰 규정했다. ‘문빠’는 광장과 의회의 교차로에서 폭력을 줄이고 의사소통적 권력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담지자로서, 다국적 거대기업에 놀아나는 정치와 관료, 추상적인 진보논리로 현실을 외면하는 지식인, 노동자의 권리를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으로 수렴시킨 운동세력 등에 ‘반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과정으로서의 우리’라는 것이 박 교수의 주장이다.

보수와 진보의 수렴 가능성

흄을 비롯하여 영국 경험론에 관한 이론적 천착을 해 온 양선숙 경북대 교수(법학과)가 「2017-2022, 진보와 보수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네 번째 발표를 맡았다. 양 교수는 제19대 대한민국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집회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라는 최근의 사태가 함의하고 있는 정치적 의의를 로크와 흄의 사회철학 이론을 토대로 짚어보고, 보수와 진보의 수렴가능성 및 정치의 재조직화의 방향성을 논구했다. 양 교수는 두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어 기본적인 헌법적 가치를 복원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고 진단했다. 현 상황에서 보수주의자는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전통의 수립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며, 보수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진보적’ 요소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촛불집회가 다수의 시민이 공동선을 위해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그런 시민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정부는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민들이 실질적인 자유인으로 살 수 있어야만 그러한 참여가 보장될 수 있기 때문에 정부는 시민들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한 복지급부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발표는 ‘공화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회철학자이자 교육철학자인 정원규 서울대 교수(사회교육과)가 맡았다. 「교육개혁의 원칙, 끝, 그리고 시작: 루소적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정교수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이 충분히 개진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교육 개혁에 대해 원론적 검토와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공교육은 광의의 시민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정 교수는 존 듀이와 피터스의 이론 및 인적자원론을 토대로 세 가지 교육개혁의 원칙을 제안했다. 그것은 ‘교육을 통해 학습자의 학습 의욕이 고취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교육은 자신과 사회, 세계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교육이 개인의 직업적 역량과 국가의 산업적 경쟁력의 제고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교육개혁에 대한 요구들이 교육외적 맥락에서 제기돼 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교육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를 풀기위한 근본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적기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틀

양선숙 교수가 논문 첫머리에 인용한 로티의 말대로 우리는 오직 회고적으로만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촛불혁명과 그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평가하기에는 이른 시점에 위치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고즈넉한 캠퍼스의 풍경이 대변하듯 이 사회는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완성돼 가려면 우리 사회의 공통의 목표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는 끊임없이 진행돼야 할 것이고, 철학자들의 진지한 제언은 그런 논의의 촉매제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주제와 관점을 가지고 이루어진 제언들임에도 발표자들은 오늘날의 상황이 지금까지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넘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세월이 더 지난 후에 우리가 진정 진보의 과정에 있었음을 회고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간략한 참관기를 마친다.


이유선 서울대 기초교육원·철학
고려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논문으로 「자유와 사회적 실험」, 저서로는 「리처드 로티』, 역서로는 『철학의 재구성』이 있다. 사회와철학연구회에서 연구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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