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계와 꽃가루의 유혹 견뎌낸 대작…앙드레 지드의 사과를 끌어내다
사교계와 꽃가루의 유혹 견뎌낸 대작…앙드레 지드의 사과를 끌어내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7.11.15 1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제31강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의 「프루스트, 현대 소설의 한 기원」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2017년 강연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 강연 4섹션 ‘문학’ 영역으로 이동했다.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은 34강에 걸쳐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가능케 한 역사적 인물 혹은 작품을 선정해 혁신적 사유를 조명해보는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네 번째 강연 시리즈다. 네 번째 ‘문학’ 강연을 맡은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의 제31강 「프루스트, 현대 소설의 한 기원」 발표문 일부를 요약 발췌했다.

사진·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프루스트가 본격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38세가 되던 1909년 무렵이다. 발자크의 방대한 『인간희극』이 채무자들의 위협 속에서 창조됐다고 한다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정밀하고도 방대한 세계는 지병인 천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과 싸우는 벼랑 끝에서 구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의는 아니지만 병이 그에게 결과적으로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 지금까지 드나들던 사교계의 유혹과 꽃가루의 해독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오직 작품의 창작에 매진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천식에 유해한 냄새를 차단하기 위해 창은 밀폐되었고, 훈증 요법 때문에 방안은 연기 냄새로 가득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고 언제나 침대에 눕거나 반쯤 일어나 앉은 채 집필에 몰두하다가 밤에만 외출을 하는 생활이 1922년 그의 임종 때까지 13년 동안 계속됐다.

구원의 실마리가 된 천식

1912년, 첫째 권 『스완네 집 쪽으로』를 위시한 소설의 원고는 모두 1200여 페이지에 달했다. 프루스트는 그 첫 권의 원고를 몇몇 출판사에서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 가운데에는 앙드레 지드가 편집책임자로 있으며 당대 최고의 문예지 <NRF>를 펴내고 있던 갈리마르 출판사도 있었다. 결국 프루스트는 그라세 출판사에서 행을 바꾸지 않은 채 페이지 전체를 활자로 빼곡하게 채운 답답한 몰골의 책으로 자비 출판하지 않으면 안 됐다. 1913년 11월, 제1차 대전 직전의 일이었다. 513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그 내용이 ‘1) 콩브레, 2) 스완의 사랑, 3) 고장의 이름: 이름’의 3부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이 첫 권의 표지는 1914년에 이어서 완간될 예정인 두 권의 책, 즉 『게르망트 쪽』과 『되찾은 시간』이 합쳐져야 비로소 완성될 것임을 밝히고 있었다.

프루스트가 보낸 제1권 『스완의 집 쪽으로』의 원고에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었던 문단의 평가는 책의 출간과 함께 정반대로 돌아선다. 이 소설의 독창성은 안목 있는 비평가들에 의해 당장에 감지됐고 당대 문단의 실력자 앙드레 지드가 프루스트에게 사과의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 갈라마르 출판사는 이제 이 첫 권에 뒤이은 책의 출판권을 얻기 위해 애쓰는 처지가 됐다. 새로이 판권을 획득한 갈리마르에서 이미 나온 제1권과 더불어 종전 후인 1919년 제2권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에서』가 출간되자 그 책은 작가가 그토록 소망하던 문학적인 성공에 더해 공쿠르 상의 영예를 안겨줬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는 독자는 이 작품이 프루스트의 개인적인 삶을 자서전적으로 엮어나간 고백록 비슷한 작품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의 내용이 작품의 직간접적인 재료로 사용되었다 해도, 이 작품은 작가의 자서전도 아니고 고백록도 아니다. 러스킨의 영향을 받은 프루스트는 당대의 비평가 생트-뵈브나 텐느와는 반대로, 작가 프루스트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인 프루스트는 근본적으로 별개라는 확고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동명 주인공 때문에 자서전, 고백록으로 오해 받아

과연 오늘날에도 프루스트는 평범한 독자들에게 일단 접근하기에 부담스러운 높은 산맥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프루스트는 읽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 까닭은 3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의 물리적인 길이도 길이지만, 문장 구조와 내용 두 가지 원인으로 압축될 수 있다. 문장구조는 한 페이지의 처음에서 시작한 문장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도록 종결부호가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긴 문장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긴 소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선 이렇게 답할 수 있다. “한 젊은이가 여러 살롱과 여러 여자, 남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우정으로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나서 성숙한 나이에 이르러 마침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혹은 좀 더 다양한 에피소드와 등장인물들과 관련해 이 작품의 줄거리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비평가의 비유처럼, 이 소설을 이런 식으로 압축하는 것은 모네를 가리켜 “성당과 센 강의 풍경 그리고 수련을 많이 그린 화가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프루스트도 이와 다르지 않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진정한 가치는 독자가 정교한 미로처럼 꽉 짜인 내밀한 언어들을 따라가면서, 프루스트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포착하여 언어로 고정시킨 방식을 느끼고, 그 극도로 섬세한 의식에 공감하며, 그 언어들이 펼쳐 보이는 풍부한 세계를 감지할 때에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가치는 독서, 그것도 여러 차례의 독서를 하지 않고서는 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미로처럼 꽉 짜인 내밀한 언어들의 미로

이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소설 속 ‘목소리(voix)’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나’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화자로서의 ‘나’가 있다. 이 ‘나’는 소설의 첫 부분에서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며 잠자리의 드라마를 펼쳐 보이는 목소리이다. 이 화자로서의 ‘나’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현재의 시점에 위치해 있고, 이야기는 그의 현재의 시선과 의식과 목소리를 통하여 직조된다.

또 한편에는 이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의 ‘나’가 있다. 콩브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어린이다. 게르망트 부인을 사모하고 스완의 딸 질베르트를 사랑하는가 하면 귀족 사교계에 드나들고, 발베크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여자 알베르틴과 동거하고 두 번씩이나 요양소를 드나들다가 마침내 1차 대전 뒤 게르망트 대공 댁 마티네에 초대받아 찾아가는 젊은이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서의 ‘나’이다. 이 ‘나’는 어린 시절(1883년, 5~14살 무렵)에서부터 어른이 된 이후 게르망트 대공 댁의 ‘마티네’에 이르기(1925년 경, 47세)까지 40여 년간, 자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세월을 따라 부단히 변모한다. 이 같은 변신, 변모를 가져온 것은 흐르는 시간, 즉 ‘잃어버린 시간’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

그는 자신이 삶 전체에 걸쳐 암암리에 가장 내심 깊은 관심사로 삼아온,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 즉 작가로서의 ‘소명’을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뚜렷하게 의식하고 그 부름에 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자신의 예술을 통해서 ‘되찾자’고 결심하는 것이다. 주인공 ‘나’가 작가로서의 소명을 분명히 깨닫고,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을 그려보리라”라고 선언하는 바로 그 지점, 대단원에서 이 소설은 마침내 쓰이기 시작한다. 주인공 ‘나’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마침내 화자 ‘나’로 변신하고, 소설의 마지막은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화자가 쓴 소설, 즉 독자가 읽게 되는 소설이 시작되는 셈이다.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렇게 말이다. 마치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그 끝이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와 맞물리면서 거대하고 둥근 원을 이루는 이 구조는 이 소설의 형식상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거치는 인생의 행로들과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에 중점을 두고 이 작품을 바라보면, 이 소설 전체는 주인공이 작가로서의 소명을 발견해가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진정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여러 예술가들로부터 직간접적인 인도를 받는다. 작가 베르고트, 화가 엘스티르, 음악가 뱅퇴유가 서로 다른 예술 장르를 대표한다.

이들은 프루스트가 실존 인물들 여러 명을 모델로 하여 새로이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들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주인공을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프루스트가 창조한 허구의 예술가 외에도, 이 소설에는 100명이 넘는 실제 예술가와 200여 점의 실제 작품들이 언급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소설의 구조 자체가 전통 소설과 다르고, 별다른 줄거리의 전개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서를 힘들게 한다. 거기에 더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숱한 예술 작품들과 그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한편으로 독자를 지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 경험을 제한하는 진부한 표현들

이 작품 전체가 고전과 현대를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참조하며,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예술과 작가를 논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 자체가 주인공이 작가로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2편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에서 주인공은 그토록 칭송받는 라 베르마의 연기를 관람하지만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실망만을 느낀다. 그러다 제3편 『게르망트 쪽』에 이르러 다시 같은 작품의 공연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참된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만큼 그동안 주인공의 예술적 안목이 깊고 높아진 것이다.

프루스트는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진부한 표현을 피하고 가장 정직하고 가장 적합한 말을 찾아내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관습적인 표현이 반드시 잘못된 관념을 담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관습적인 표현은 때로 가장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피상적인 표현은 우리의 경험의 실체를 진정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그런 진부한 표현들이 우리의 경험 자체를 제한하여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진부한 상태로 머물게 한다.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표현하는 것은 곧 새로운 경험이자 새로운 인식이다. 프루스트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 엄밀하고도 새로운 정의를 시도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습적인 방식을 버리고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을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로 표현하는 것, 바로 여기에 프루스트의 독창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