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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제도의 마력
평가제도의 마력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17.11.1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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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정권은 바뀌어도 대학들을 통치하는 교육부의 의도와 방법에는 변화가 없다. 온갖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교육부는 ‘대학 구조개혁 평가’를 ‘대학 기본역량 진단’으로 이름을 바꾸는 정도로 고수하겠다고 나섰다. ‘진단과 지원’에 중점을 두겠다지만, 기존의 평가틀을 유지할 뿐 아니라 재정지원이라는 이름의 차등 보상도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가제도’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도구로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해 난이도나 변별력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것의 객관성이나 중립성을, 그리고 ‘수능점수’로 전국의 대입 수험생을 줄세우는 것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주관적인’ 학생부보다 ‘객관적인’ 수능 점수로 학생을 뽑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평가제도의 속성은 그렇게 간명하지 않다. 평가는 주체와 객체가 명확히 분리돼, 주체가 척도를 적용해 객체를 측정하는 활동이다. 평가에서 주체는 능동적이고 객체는 피동적이다. 그리고 척도는 자연이나 신이 제공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것이다. 척도를 만드는 데는 당연히 관련된 사회세력들의 힘이 작용하며 그러므로 척도는 관련된 세력들의 이해관계와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더욱이 평가는 확인 가능하고 수량화 가능한 것들을 측정하기 때문에 객체들의 특성 가운데 일부의 ‘질’만을 ‘양’으로 환원하는 단순화를 동반한다. 고등학교 교육 내용 중 ‘객관식 문항’을 구성하는 5개의 답지를 만들 수 없는 것은 수능에 출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만들어진 수능 점수라는 숫자는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암흑상자 속에 감춰버리고(black-boxing), 수험생들을 1등, 2등의 순서(그것이 등급이던, 순위이던)로 하나의 서열체계 속에 배치한다.

이른바 ‘대학평가’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대학들의 독특하고 복잡한 고유한 특성들 중 일부만을 평가지표를 사용해 ‘점수’로 환원하고 ‘순위’로 표시함으로써 각각을, 1등급, 2등급 등 숫자로 개별화하고 동시에 숫자들에 의해 서열적으로 군집화한다. 여기서 평가지표라는 것이 대학들의 특성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는 항목들이 아니라 측정가능하고 수량화 가능한 항목들로 구성된다는 점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연구의 질은 교수들이 발표한 논문 편수가 많을수록 높게 평가되고, 교육의 질은 학생의 취업률이 높을수록 높게 평가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평가지표는 그것이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빈약하게 또는 왜곡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학의 ‘질’을 빈곤화하고 악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평가제도는 평가의 객체가 ‘객체’로 멈춰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평가지표가 제시되면 대학들은, 서열구조의 압박 속에서 더구나 차등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순위를 돈과 묶어놓으면, 앞 다투어 점수 경쟁에 뛰어든다. 평가제도가 동반하는 또는 유도하는 기준들에 맞춰 스스로를 규율할 뿐 아니라 심지어 교묘한 꼼수나 부정직한 술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개별 대학들은 평가 지표들을 제도화하고 내면화하면서 평가 주체와 ‘공모’할 뿐 아니라 스스로 점수를 산정하면서 평가 주체로 변모해 가담한다. 간단히 점수 벌레가 되어, 자발적으로 다양성을 차별하고 처벌하며 ‘표준화’, ‘균질화’ 또는 ‘획일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평가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제도가 아니라, 대학들 사이에 그리고 대학들 내부에 자발적으로 광포한 고립과 경쟁에 나서도록 강제하고 그것을 통해 지배와 통치를 공고화하는 매우 ‘정치적인’ 제도다. 대학들이 스스로 순치돼 규율하고 제약하며 복종하는, 중독적인 마력을 가진 제도를 교육부가 포기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물론 이 악마적인 제도가 대학을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는 교육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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