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되길 거부했던 자연인…거장이 붙든 평생 화두,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문명화되길 거부했던 자연인…거장이 붙든 평생 화두, “어떻게 죽을 것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17.11.0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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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제30강 석영중 고려대 교수의 「톨스토이, 문명과 인간」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2017년 강연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 강연 4섹션 ‘문학’ 영역으로 이동했다.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은 34강에 걸쳐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가능케 한 역사적 인물 혹은 작품을 선정해 혁신적 사유를 조명해보는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네 번째 강연 시리즈다. 세 번째 ‘문학’ 강연을 맡은 석영중 고려대 교수(노어노문학과)의 제30강 「톨스토이, 문명과 인간」 발표문 일부를 요약 발췌했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석영중 고려대 교수(노어노문학과). 사진 제공 = 네이버 문화재단
석영중 고려대 교수(노어노문학과). 사진 제공 = 네이버 문화재단

 

톨스토이 문학과 사상 전체를 아우르는 한 가지 화두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 90권짜리 톨스토이 전집은 그 전체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작가의 집요한 사색과 고뇌를 기록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탐색은 문명과 자연, 삶과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씨줄과 날줄로 진행된다. 이 네 가지 키워드는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고 얽히고설키는 가운데 톨스토이 특유의 삶에 대한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세적인 철학, 궁극적으로 도덕이라 불리게 될 철학을 구축한다.

톨스토이에게 문명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가변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가장 간단한 도구에서부터 기술, 과학, 관습, 사회제도, 종교, 교육, 문화, 예술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자연’이 아닌 모든 것,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모든 것이 곧 문명이다.

자연 역시 그 못지않게 광범위하고 가변적이다. 자연은 일차적으로 문명이 아닌 것,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 대부분을 가리킨다. 그에게서 자연(Nature)과 자연력(the Elements)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광도 산도 폭풍우도 눈보라도 모두 자연이라는 한 가지 개념으로 범주화되며 문명과 구별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과 자연은 대립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영역이다.

상호배타적인 두 개의 영역

톨스토이에게 문명과 자연 간의 대립과 충돌은 인간의 조건이다. 도구에서부터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명, 그리고 풀 한 포기에서 인간의 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자연은 인간의 생존을 지지해주는 두 개의 버팀목이다. 따라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의 모색은 이 두 개의 버팀목에서 시작해야 한다. 문명과 자연 간의 대립이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유표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답을 추구하던 톨스토이는 원숙기에 들어서면서 인생을 말할 때는 그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영역 외에 또 하나의 영역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톨스토이는 그것을 때로는 ‘정신’, 혹은 ‘영혼’, 혹은 ‘이성적 의식’이라 부른다. 의식, 혹은 영혼은 문명 대 자연의 대립 관계를 넘어서는 모종의 다른 영역, 모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딘가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일부이지만 인간의 자연적인 조건을 넘어서고 인간의 창조적 삶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공적인 모든 것과 충돌한다.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이성적 의식은 인간의 최고의 능력이며 시공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 인간의 삶을 추동시키는 어떤 것이라 정의한다. 그보다 더 나중에 쓰인 교훈적 저술 『인생의 길』은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나와 세계에는 육체적인 것 이외에 육체에 생명을 주고, 육체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육체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육체와 이어진 육체적이지 않은 이 ‘어떤 것’을 우리는 영혼이라 부른다.

자연을 초극하는 영혼

톨스토이는 소설과 평론에서 영혼이라는 표현을 무척 자주 사용한다. 특히 “양심은 영혼의 목소리다” “참된 삶은 영혼의 삶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영혼의 행복뿐이다” 등등, 후기의 교훈적 에세이에서 영혼은 도덕적 함의와 함께 끊임없이 강조된다. 그러나 여기서 영혼이란 특별히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다. “영혼불멸”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교리와도 큰 상관이 없다.

톨스토이의 영혼은 문명과 자연을 초극하는 어떤 것,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초자연적인’ 어떤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의 ‘초자연’은 오늘날 여러 다양한 맥락에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이를테면 좀비, 불가사의, 신통력과는 공통점이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자연을 넘어서는 것, 자연보다 우월한 것, 곧 영혼의 영역을 지칭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톨스토이는 점차 문명-자연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영혼(정신)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영혼 영역의 맨 밑바닥에서 그가 찾은 것이 도덕이었다. ‘문명 대 자연’의 대립은 그리하여 ‘문명 대 도덕’, ‘자연 대 도덕’의 대립으로 분화됐다. 톨스토이가 도덕에서 답을 찾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문명과 자연의 대립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었고 이상적인 삶의 실천 가능성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문명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를 도덕의 심연으로 밀어 넣은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죽음이었다. 톨스토이에게 죽음은 삶의 이면이었으며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동일한 문제의 양면이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풀기 위한 문명-자연-도덕의 3중 코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코드이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문명관, 자연관, 도덕론, 그리고 인생론을 말할 때 반드시 죽음의 문제를 함께 논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참회록』이란 저자가 자신의 과오를 치열하게 반성하고 그 반성을 토대로 거듭남의 과정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자서전이다. 이러한 거듭나기를 우리는 ‘회심’이라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의 참회록은 이 점에서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 역시 외관상 참회록 저자들의 선례를 따른다. 그 역시 자신의 과오를 통렬하게 참회하고 도덕적인 거듭나기를 천명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참회록』의 출간을 톨스토이의 ‘회심’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기점으로 그의 일생을 회심 전과 후로 나누어 본다.

죽음의 확실성에 대한 자각

그러나 『참회록』이 톨스토이의 참회와 반성을 기조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 참회와 반성의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죽음의 확실성에 대한 자각이다. 죽음의 확실성을 자각하면 할수록 그는 더 이상 이제까지와 같이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참회도 반성도 거듭나기도 모두 죽음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참회록』 전체에 걸쳐 대단히 상세하게 죽음의 문제를 설파하는데 그의 진술은 자포자기에 가깝고 논조는 시종일관 패배주의적이다. 무슨 일을 하건, 어떻게 살건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반문은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So what?)이다.

의혹과 회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톨스토이는 스스로에게 수백 번 되묻는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온 세계 모든 작가보다 빛나는 명성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건가?”. 요컨대 죽음이 한순간 모든 것을 앗아간다면 명예와 명성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이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그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생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죽음의 확실성 앞에서 절대적인 허무를 체험하는 그는 묻는다. 허무와 무기력을 딛고 일어서서 다시금 살 수 있도록 해줄 그 무엇인가는 어디 있는가? 왜 나는 살지 않으면 안 되는가?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소멸할 내 삶에서 참되고 불멸인 무엇인가가 있는가? 이 무한한 세상에서 유한한 내 존재는 어떤 의의를 갖는가?

이렇게 『참회록』은 죽음을 한 인간의 회심의 계기로서 전면적으로 다루지만 사실상 죽음은 『참회록』만의 문제가 아니라 톨스토이의 전 생애의 문제이다. 『참회록』에서 철학적 산문으로 설명된 죽음의 문제는 그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다양한 언어와 방식으로 다뤄진다.

작가로 데뷔한 시점부터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톨스토이는 강박적일 정도로 죽음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작가보다도 죽음에 관해 많이 생각했으며, 「세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주인과 하인」 같은 죽음을 테마로 하는 소설을 여러 편 썼으며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에는 예외 없이 임종에 관한 상세한 묘사를 포함시켰다.
연구자들이 그를 가리켜 ‘죽음의 시인’이라 부르는 것도, 그의 전 작품을 한마디로 ‘죽음과의 대화’라 규정하는 것도 모두 다 근거가 있는 것이다.

문명화 vs. 자연화

톨스토이가 도덕의 문제에 깊이 파고들면서 문명과 자연의 단순한 대립 구조는 변형됐다. 요컨대 문명이냐 자연이냐가 아니라 ‘문명화’이냐 ‘자연화’이냐가 문제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톨스토이는 문명과 문명으로 인한 부도덕의 관련성을 ‘문명화’란 표현으로 정의한다. 즉 문명이 아니라 문명화된 인간, 문명화된 사회, 문명화된 계급이 부도덕한 것이며 대부분의 문명화된 인간이 누리고 있는 것들, 재산, 관습, 교양, 종교, 예술이 부도덕한 것이다. 재산, 관습, 교양, 종교, 예술은 ‘문명화됐다’는 그 이유에서 위선적인 것이며 위선적이라는 이유에서 부도덕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연화’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예술에 나타나는 바의 반문명적인 거의 모든 것은 ‘자연화’로 설명된다. ‘자연화’는 문명의 반대로서의 자연이나 야만과는 조금 다르다. 문명과 문명화가 다르듯이 자연과 자연화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화 된’ 삶(혹은 자연화 된 인간)은 자연 자체, 혹은 야만이 아니라 자연에 가까운 삶, 순리를 따르는 삶, 자연스러운 삶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진실된 것이며 그래서 ‘성스러운 것’이다.

여기에는 도덕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문명화된 삶’은 부도덕한 것이고 ‘자연화 된 삶’은 도덕적인 것이다. 문명화된 삶은 이기적이고 위선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이며 자연화 된 삶은 이타적이고 진실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진실하고 자유로운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며 이것은 또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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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2017-11-06 16:19:19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현세의 부귀영화는 의미가 없다. 성직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구도자들이 경전이나 명상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과학자와 종교학자도 유능한 학자로 출세하기 위해서 무비판적이며 맹목적으로 기존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데만 치중하므로 학문의 오류를 탐지하지 못한다.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유명한 대학교수들도 반론을 못한다. 이 책을 보면 그들이 반론을 못한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