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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꾼 사람들] ⑨조선중기 자연철학자 김석문
[역사를 가꾼 사람들] ⑨조선중기 자연철학자 김석문
  • 박권수 서울시립대
  • 승인 2002.03.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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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 地轉說 고안한 사색가

박권수 / 서울시립대 강사·과학사

학문의 세계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수용이 지니는 중요성은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경우에도 덜하지 않았다. 특히 17세기 이후 중국을 통해 전래되기 시작한 서양의 과학지식은, 그것을 접할 수 있었던 학자들과 그러지 못한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간격을 차츰 벌여놓았다. 게다가 정보의 전달속도 또한 아주 느려서, 한번 벌어진 학문적 수준차를 다시 좁히기란 쉽지 않았다. 중국을 다녀온 사신일행에 의해 수입된 서학류 서적들은,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이용해 빌려보거나 베껴보는 방식으로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金錫文은 운이 좋은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노론 척신으로서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천문학에도 나름대로 조예가 있었던 金錫胄(1634∼1684)와 12촌 사이였다. 族弟였던 김석문의 학문을 접하고서 감탄했다고 하는 김석주는, 청풍 김씨 가문을 일으켰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강력히 추진했고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 시행한 역법인 시헌력의 도입을 주장했던 金堉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청풍 김씨 가문의 정치적, 학문적 배경을 생각하건대, 김석문은 중국에서 수입된 漢譯서학서들을 구해서 읽는 데 그다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그의 地轉說 이론을 담고 있는 ‘易學二十四圖解’라는 책에는 한역서학서인 ‘五緯曆志’라는 책이 자주 인용돼 있다.

서양의 과학지식, 성리학과 융합

하지만 김석문의 학문에 당대의 유학자들과 후대의 사학자들에게까지 특별히 평가받을 만큼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가 새로운 서양과학 지식을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단지 전래된 지식들을 수용하는 일에만 열중했다면, 김석문은 ‘역학이십사도해’와 같은 저술을 완성하거나 독창적인 지전설을 고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석문이 지전설을 고안하고 ‘역학이십사도해’라는 독특한 저술을 남긴 것은, 그가 새롭게 받아들인 서양의 과학지식들을 기존의 지식체계와 융합하고 혼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지식의 수용과 더불어 변용과 기존 지식체계와의 융합이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과학지식’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서양의 천문학 지식들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地圓說과 우주에 대한 구조론적 논의 방식, 태양계와 행성에 대한 이론과 관찰결과들이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대해 ‘기존의 지식체계’란 중국과 조선에서 이전까지 존재했던 曆法체계를 비롯하여 성리학적 자연철학 체계를 구성하는 태극과 理氣, 음양오행의 개념들, 그리고 ‘周易’에 대한 학문인 易學과 象數學적 이론체계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 지식체계 중에서 김석문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용어와 개념들이 전통적인 자연철학에서 기인했기에, 김석문은 분명 성리학적 자연철학의 테두리 내에서 사고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가 읽은 많은 한역서학서와 역법관련 서적들에 수록된 천문학 관련 내용의 상당부분들은, 전문적인 천문역산을 공부하지 않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역학이십사도해’에는 천문역산의 전문가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기초적 문제들에 대한 오류와 오해들이 실려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전문적인 천문학자가 아니라 성리학적 자연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과학지식은 김석문에게 새로운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이러한 다방면의 지식들의 섭렵과 융합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분명 많은 양의 독서와 그에 상응하는 사색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김석문은 스스로 “‘주역’과 주돈이, 소옹, 정자, 장재 등의 책들을 좋아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제자백가의 설을 섭렵했고, 曆法, 地誌와 六藝의 서적에서 취사하고 회통시키지 않음이 없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서적의 섭렵과 회통을 통해 그는 “능히 천지와 日月星辰, 水火土石을 관찰할 수 있었으니, 이로써 날짐승과 들짐승, 초목과 사람의 본성의 착함과 악함, 죽음과 삶에 이르기까지 관찰하고 연구하여 음양의 이치와 고금의 변화에 정통했다”고 자부하기까지 한다. 그 결과 그는 나이 40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역학이십사도해’의 저본이 된 ‘易學圖解’라는 책을 저술했던 것이다.

‘법고창신’의 유학자

실제로 김석문은 혼자서 독서하고 사색하는 시간에 익숙했고 또 그것을 즐기며 평생을 전원에서 살아간 학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친지가 없고 병이 많아 사람들과 더불어 교유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포천군 가산면에 있는 大谷 선산아래에다 집을 짓고 평생을 독서와 원예 및 逍遙로 보냈다. 그가 고향을 떠나 있었던 때는 69세에 음서로 채용돼 通川郡守로 재임한 기간 뿐이었다. 실록에는 ‘김석문이 통천군의 행정을 패륜한 아들에게 맡기고 있으므로 원망과 비방이 갈수록 터지고 있으니, 마땅히 파직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임금에게 올라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가 음서로 얻은 수령직의 임무도 내팽개칠 정도로 몰두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남겨진 기록들을 참고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역학이십사도해’를 판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독서를 통한 새로운 지식의 수용과 사색과 저술이 그의 일생을 채웠던 것이다.

학자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여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항상 외부세계에 대해 스스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거나 그럴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학자는 기존의 이론과 전통적인 텍스트의 비좁은 세계 속에 매몰돼 버리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대, 김석문은 새로운 과학지식의 수용과 전통적 자연철학의 계승을 통해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해나간 중요한 유학자들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mimizi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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