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9:00 (금)
당신은 몇 등 입니까? … 자기도취적 거울게임
당신은 몇 등 입니까? … 자기도취적 거울게임
  • 이상길
  • 승인 2003.05.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분석] 일간지 순위 매기기 기사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몇몇 신문·잡지가 잇달아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순위 매기기를 시도하고 나섰다. 연초 ‘월간 미술’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들’을 뽑았는가 하면, ‘필름2.0’ 최신호는 ‘20세기 최고의 한국영화와 영화감독’을 선정했다. ‘동아일보’는 아예 출판, 문학, 무용, 미술, 음악, 방송연예, 영화, 종교 전반에 걸쳐, ‘전문가가 뽑은 각 분야 최고’를 신년기획으로 몇 달간 연재하기도 했다.

이런 기사들이 내걸고 있는 기획의도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될 만하다. ‘새로운 세대로 본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그려본다거나, ‘현재의 한국영화가 발 딛고 선 토대를 이해’하려 한다거나, 혹은 문화예술계 인물들의 ‘객관적 위치와 실력’을 검증하겠다는 선의에 딴지를 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선의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성취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또 서양속담이 알려주듯, ‘때로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돼 있기도 한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기사의 사회적 의미와 의도되지 않은 효과를 되짚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평가에는 주체와 기준이 있게 마련이다. 관련된 주체와 기준의 적절성은 평가의 공정성을 떠받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위의 ‘순위기사’들의 경우, 표면상 평가주체는 해당분야의 전문가 집단이고, 평가기준은 집단구성원 개개인의 직업적인 판단력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더없이 자율적인 듯한 이런 절차는 사실 언론사라는 ‘숨은 신’에 의해 조정된다.

언론사라는 ‘숨은신’
‘동아일보’의 경우, 각 분야별로 설문대상자를 정할 때 기자의 주관은 배제하고 “여러 전문가 집단에 자문해 결정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문가 집단’을 선정하기 위한 자문용의 여러 전문가 집단을 선정한 사람은 또 누구였던 것일까. 이들 가운데, 언론사가 부과한 ‘순위매기기’의 기획에 호응하지 않는 무응답자들은 ‘전문가 집단’에서 자연스럽게 탈락한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순위에 반영시키게 되는 전문가들은 결국 언론사와 ‘선택적 친화력’을 보이고 있다는 공통점만을 지닐 뿐, 특별한 대표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집단인 것이다. 

언론사가 마련한 설문지는 이렇게 선정된 ‘전문가 집단’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제한한다. “누가 다음 각 부문의 최고인가-감성적인 글쓰기, 기타 등등”, “20세기 최고의 한국감독은 누구인지 세 명만 써 달라”…. 이런 질문들 앞에 ‘감성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최고’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등의 ‘전문적인’ 문제제기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상식선에서 이해돼야 하는 질문은 상식선의 대답, 즉 언론사와 문화예술계 사이에서 ‘돌고 도는 정보’를 즉각적으로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이 전문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문가로서의 권위일 뿐, 진정한 의미의 전문성은 아닌 것이다.   

이런 설문조사를 거쳐 놀랄만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놀랄 일일 것이다. 아쉽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조사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 비교적 덜 충격적”(동아일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순위에 오른 “대부분의 작가와 작품은 이미 ‘월간 미술’을 통해 여러 번 소개된 바”(월간 미술) 있다는 점을 알게 되고, “공인된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와 감독들이 어김없이 상위권을 차지한 점”(필름2.0) 또한 알게 된다. “시장에서의 검증이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어느 정도 반영돼왔다”(동아일보)는 것이다.

내면화된 경쟁·서열의식에 소구
그다지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결과를 보여주는 ‘순위기사’들이 訴求하는 지점은 바로 우리들의 내면화된 경쟁심리와 서열의식이다. 그로부터 솟아난 얄팍한 호기심을 재빨리 상식 속으로 흡수해내면서 ‘순위기사’는 또다른 만족감을 준다. 외양상 객관적이며 집단적인 전문가들의 평가 속에서, 독자들은 (언론으로부터 얻은) 상식을, 언론사들은 자사 보도의 정당성과 영향력을,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은 지배적인 평가와 공적인 명성의 힘을 재확인하게 된다.  

‘순위기사’는 언론계와 문화예술계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자기도취적 거울게임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주류의 규범, 주류의 감수성을 사회적으로 공인하고 재생산하는 절차다. 그것은 지배적인 질서와 위계, 통념을 강화시키면서, ‘인디’와 ‘언더’, ‘안티’의 운동이 우리 문화 안에서 언제나 하위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리하여 언론사 혹은 ‘전문가 집단’과 함께 발맞추는 지배문화의 평온한 블루스는 오늘도 계속된다.

이상길 / 성균관대·신문방송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