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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으로 소환된 병자호란부터 일제강점기 여성 엘리트들의 대일협력까지 진단
2017년으로 소환된 병자호란부터 일제강점기 여성 엘리트들의 대일협력까지 진단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7.10.30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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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전국역사학대회 눈길 끄는 분과별 논문은?

사학사부: 「병자호란 연구의 제 문제」
조성을 아주대 교수(동양사학회)

병자호란과 그 결과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전체적 문제와 관련돼 있다. 해방 후 남북의 학계는 식민사학의 정체론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론, 새로운 국가체제 지향으로서 실학의 대두 등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이것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최근 이에 대한 회의론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런 연구 성과에 기초한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조선후기 내재적 발전론은 당쟁망국론의 입장에 있는 식민지 시기의 조선정치사 연구와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1970년대 이후 조선의 당쟁을 붕당정치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조선 망국의 원인을 수백 년 전의 병자호란, 계해정변에서 찾는 것은 지나치게 멀어 확실한 인과관계 말하기 어렵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다른 원인들을 망국의 원인으로 들 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수백 년간 정치적 폐해가 누적된 것은 부정할 수 없고 정치의 구조적 문제가 국가의 총체적 개혁을 불가능하게 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이것은 내재적인 사회경제적 발전과 새로운 사상의 발전에 큰 제약이 됐다.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제약 상황에서 준비 없이 개항을 맞이하여 망국에 이르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 내재적 발전론과 부정적 정치사 인식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상호연관 관계 하에서, 상부구조의 강력한 역규정성이라는 우리역사의 특수성이라는 관점에서 봐야만 전체 역사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면적으로 보는 역사주의적 관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대주의’의 심화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됐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됐었다. 명나라에 대한 ‘再造之恩’과 ‘숭명 사대의식’은 양란 후 조선의 사족층 일반에서 절대적인 정치이념이 됐다. 이것은 당파를 초월하여 사족층 일반이 공유하는 ‘公論’으로서 광해군이나 주화파 관료들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멘탈리티는 다소 변형된 형태로 조선왕조 말까지 지속됐으며 보다 현대의 집권층과 기득권층 내에서 오히려 보다 강화된 ‘현대판 사대주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자세로는 21세기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남북관계에 대응할 수 없게 한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를 되돌아보면서,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거시적 역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오늘 우리를 치열하게 반성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병자호란의 현재적 의미가 있다.

 

여성사부: 「일제말 여성 교육엘리트들의 대일협력: 김활란을 중심으로」
예지숙 서울대 강사(한국여성사학회)

김활란을 비롯한 여성 명사들의 일제 말 협력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이다. 6월 항쟁 이후 ‘친일파 청산’의 탈식민 과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고, 여성 명사들의 1930년대 중반 이후 대일 협력 행위에 관심이 집중돼 이들의 협력행위가 소상히 밝혀졌다. 두 번째는 2000년대 탈민족주의적 흐름에 입각해 이뤄졌다.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에서 ‘친일’ 행위를 중심적으로 평가하면서 그간 배제됐던 여성교육가·운동가로서 이들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여성 대 민족’이라는 구도 속에서 전개됐다. 또한 이 시기 연구는 대일 협력의 내적 논리와 협력의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여성명사들이 자처했던 수동적 협력자의 위치를 재해석하였으며 협력의 자발성과 논리를 밝히는데 주력했다.

그런데 2000년대 초중반 이후 이 주제에 천착한 연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후반의 집권세력에 의한 근현대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급기야 국정교과서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복고적이고 반동적인 흐름에 따라 논의의 구도는 다시 ‘레슨 원’으로 돌아갔으며, 논의 구도는 ‘친일 대 반일’,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구도를 맴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거의 구도에 따르면 여성명사들의 대일 협력은 그 실상이 이미 밝혀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천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김활란은 가장 많이 연구되고 언급된 인물이며 일제시기 민족운동의 주요 세력이었던 기독교 민족운동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약했고 협력에 있어서도 역시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간 ‘친일파’에 대한 연구가 친일 행위를 개인의 경력이나 자질의 문제로 환원해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일제의 지배구조와 이에 대한 민족운동의 저항이라는 틀 속에서 논리를 추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족문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김활란의 대일협력을 살펴봐야 한다. 1930년대 조선사회는 민족 단일 정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회로 변화했음에 유의하고자 한다. 식민사회는 민족모순이 기본적인 사회였으나 민족모순이 가시화 현실화되는 방식은 구성원이 처한 민족 내부의 위치에 따라 달랐다. 이러한 사회구조를 경시하고 ‘민족 대 반민족’이라던가 ‘민족 대 여성’이라는 반듯하고 깔끔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민족’과 ‘여성’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협력자들의 언급도 똑같이 고통 받는 피지배자의 처지를 전제한 것으로 이에 대한 보다 섬세한 이해가 필요하다.  


교육사부: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
오성철 서울교대 교수(한국교육사학회)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을 고찰할 때, 그토록 단기간에—즉 1945년 9월의 미군정 시작에서부터 1948년의 교육위원회 발족과 신제 고교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분야에 걸쳐—학제와 교육행정의 개혁에서 출발해 초등, 중등, 고등교육 및 교사양성, 사회교육 등 각 단계의 체제개혁, 나아가 단원 학습의 도입과 같은 교수방법 개혁에 이르기까지—개혁안이 마련되고 그것이 실현돼 구조적 개혁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차라리 예외적인 사례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전후 미군에 의한 점령과 연합군총사령부에 의한 전제적인 압박이 없었더라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후 일본 교육개혁을 창출한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찰해야 할 것은 미군정의 외적인 개혁 압력일 것이다. 교육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의 탈군사화와 민주화를 지향한 —적어도 초기의— 미군정의 강력하고 일관된 개혁 방침과 조치가 없었다면 전후 일본교육의 개혁은 그만큼 난망한 과제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을 단순한 외적인 정치적 강요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교육개혁의 배경ㆍ기반에는 패전 이후 일본 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다이쇼 데모크라시기의 진보적 개혁적인 교육이론과 사상, ‘生活綴方運動)’과 같은 교육운동 등의 유산이 존재했으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상적·운동적 기반이 전전의 일본에 존재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내재적 개혁세력의 존재라는 요인은 ‘일본측교육가위원회’나 ‘교육쇄신심의회’의 개혁 활동과 그 제안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의 결합이 전후 일본 교육개혁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은 메이지유신 이후 약 70여년의 역사를 지니며 형성돼온 ‘일본적’ 근대교육에 대한 총결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전 일본의 근대교육은 ‘윤리적 폭군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버틀란트 러셀이 찬탄할 정도였다.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은 ‘천황의 신민’ 만들기 장치로 작동해 온 근대 교육체제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 ‘형식; 제도, 행정체제에서부터 교수방법과 훈육방법에 이르기까지’의 개혁을 추구하게 됐다.
예를 들어 그 개혁은 교과서의 군국주의적인 부분에 먹칠을 한다거나 그것을 민주주의와 같은 새로운 ‘내용’으로 다시 채우는 차원을 넘어서서 국정교과서제도라는 ‘형식’ 자체를 혁파하는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을 전술한 것과 같은 이상의 순조로운 실현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점령하의 개혁’이 지닌 역설이다. 연합군총사령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교육개혁 방식 자체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미군정의 독점적 영향력 자체가 지닌 한계를 보자. 일본에서 연합군총사령부의 결정은 미군정이 형식적으로는 1개국 반파시즘 연합국 대포로 구성된 ‘극동위원회’ 및 미·소·중·영 등 4개국 대표로 구성된 ‘대일이사회’의 협의를 거치게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이 두 위원회를 무력화시켰고 사실상 미군에 의한 독점적인 지배로 일관했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교육개혁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틀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는 근본적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CIE의 문부성에 대한 이른바 ‘내면지도’ 방식과 형태 자체가 문부성의 존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CIE는 교육의 중앙집권체제를 타파하고 분권화를 권장하면서도 개혁을 수행할 때에는 중앙교육행정기구인 문부성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 문부성을 중심으로 전전의 교육행정권력들이 재결집하게 됐고 그들은 강화조약으로 미군정이 종식된 이후에 말하자면 ‘捲土重來’ 했던 것이다. 앞 장 3절에서 본 문부성의 보수적 회귀는 달리 말하자면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 과정에서 지양과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바, 교육에서의 ‘일본적’인 것을 다시 부활시켜 나가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유패널: 「고려 건국과 통일·통합의 정치적 함의」
문경호 공주대 교수(한국중세사학회)

<한국중세사연구>는 지난 23년 간 고려사회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고려사회의 특성에 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다원사회론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고, 외교 면에 있어서도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끝없이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했던 고려의 실리주의 외교의 실체를 밝혀내는데 기여했다.

이제 고려시대사는 ‘고려할 것이 많았던’ 고려사에서 한국 현대사회의 현실 진단과 문제 해결, 지향점 설정 등을 위해 다시금 되짚어봐야 하는 역사의 거울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50호의 학술지를 돌아보니 정치사와 경제사, 불교와 관련된 부분의 연구성과가 상당부분 축적됐다. 경제사 부분에서도 토지제도사나 사회사의 신분제도사 등과 같은 제도사에 대한 부분은 조금씩 선행연구를 보완하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긴 하지만 다소 침체된 면이 있다. 2000년대를 전후해 역사학계에도 몰아친 포스트모더니즘은 최소한 한국중세사 연구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미시적인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경향은 새롭게 나타났다기보다는 새로운 연구자료의 발굴 또는 사료의 재해석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경제 관련 연구가 여전히 양적으로나 주제면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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