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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강의에 ‘인성’평가도 … 울며 겨자먹기
연구·강의에 ‘인성’평가도 … 울며 겨자먹기
  • 허영수 기자
  • 승인 2003.05.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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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기획]계약제 이후 3 '단기 계약 임용, 무엇이 문제인가'

 

“1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3~4년 내다보는 외부 과제를 따내는 데 제약이 있었고, 그간 진행하던 연구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다보니 채 1년도 되지 않아 재계약 심사를 받게 됐다.” 지난 해 3월 수도권 소재의 ㅎ대학에 1년 계약제 교수로 임용돼 올해 재계약한 김 아무개 교수는 단적으로 지난 1년을 “1년 동안의 면접”이라고 말한다. 신규로 임용될 때 이미 연구실적과 강의를 평가받고 면접까지 통과했지만, 마치 그와 같은 심사를 믿지 못하는 듯 대학측은 9개월 동안의 연구실적과 교육·봉사 실적을 다시 따져 재계약한다는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김 교수는 의문을 제기한다. “1년도 안 되는 기간동안 대학이 검증하고 평가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연구·강의능력이었을까요?”

대학들, 試補 기간 둬 자질(?) 평가
경주대, 명신대, 세종대, 이화여대, 협성대, 홍익대 등 신임교수들에게 일종의 試補기간을 두는 대학들의 주장은 이렇다. 신임교수가 해당학교에서 교수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과연 연구·교육 능력이 부족하지는 않는지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 경주대의 한 관계자는 “교수로서의 인격에 문제가 있거나 연구·교육 능력이 형편없는 등 극단적인 경우를 대비해 1년이라는 기간을 정해 교수를 임용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들 대학에 따르면, 신임교수 통제와 단기간 계약과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강의에 소홀하지 않고, 연구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기간으로 9~10개월은 지나치게 짧은 것이 사실. 그러나 ㅇ대학의 장 아무개 교수는 “연구, 논문작성, 투고, 게재 확인, 논문 발간까지 쉽게 이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단기 계약제 교수들이 정작 불안해하는 것은 연구실적 부족으로 인한 재계약 거부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장 교수에 따르면, 연구 부분은 조금만 욕심을 줄이면 그럭저럭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대학측이 단순히 연구·강의 능력을 평가한다기보다는, 대학들이 요구하는 주관적 ‘교수상’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평가한다는 데 있다.

경주대, 경희대, 동국대, 동서대 등의 대학에서처럼 재계약·승진 심사 기준의 일부분으로 ‘인간관계의 원만성’, ‘학내·외 행사 참여 및 지도실적’, ‘건학이념 실천정도’, ‘대학발전저해정도’를 평가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우, 문제가 자못 심각해질 수 있다.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대학이 요구하는 점수를 채우지 못하면 대학들은 재계약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지금 교수 계약 임용제의 현실. 단기 계약제 교수들의 신분불안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단기 계약제 교수들에게 지침처럼 1년 동안 가급적 눈에 띄지 않고, 외부 활동을 자제하며, 눈앞에 규정이 바뀌어도 나서서 논란을 일으키지 말고, 학내의 모든 행사와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는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무관치 않다.
계약제 시행 이후, 교수들이 재계약 심사를 무사히 통과해도 대학측이 재계약의 조건으로 ‘단기 계약’을 내세울 때, 다시금 단기로 계약하는 수직적인 계약 구조도 문제다. 지난 해 설훈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사립대학 신입교원 임면 현황’에 따르면, 세종대의 경우 2001년 전체 재임용 대상자 72명 가운데 10명이 1년 이하로 임용됐으며, 2002년 상반기에는 전체 재임용 대상자인 55명 가운데 5명이 1년 이하의 계약 기간으로 임용됐다. 

1년 계약에 또 1년 계약
올해 다시 1년 전임강사로 재계약한 경남의 ㄷ대학 이 아무개 교수는 “교수들이 대학들을 골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계약에 있어서 재단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라며 단기 계약의 남용을 허용하는 계약제의 단점을 꼬집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교원 지위 법정주의는 형식적인 말뿐이고, 실상은 정년 보장을 받지 못하는 교수들이 오랜 기간 동안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계약을 유지하게끔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연구실적을 내야 하는 실정도 ‘단기 계약의 확대’로 진행되고 있는 ‘계약제’의 허점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전북 ㅎ대학의 남 아무개 교수는 “3~5년을 준비하게 되는 장기 과제에 매달리기보다는 외형적이고 양적인 단기 연구에 치중하게 된다”라며 “계약제가 연구의 질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취지에서 시행됐지만, 단기 계약제가 보편화되면서 오히려 연구의 질을 하향평준화시키고 있다”라며 합리적인 계약제 운용을 주문했다. 

불평등한 계약 구조, 점차 강화되는 업적평가·승진심사 기준 등에 둘러싸여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신임 단기 계약제 교수들. 연구 능력 강화, 우수 교수진 확보라는 미명하에 시작된 계약제와 함께, 당장 이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구조조정, 인수·합병 등이 예고되고 있는 ‘캄캄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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