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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지원방식, 학문 풍토 망쳤다”… 패러다임 전환 촉구
“잘못된 지원방식, 학문 풍토 망쳤다”… 패러다임 전환 촉구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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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정부의 학술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세 개의 토론회

기초학문 육성을 요구하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높아졌다. 기초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기초학문의 위기론을 알리는 것도 이제는 식상하다. 후속세대들의 기피 현상만으로도 이미 기초학문의 위기는 확인됐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제대로 된 현실 진단에 바탕을 둔 대안 설정일 터. 때가 됐기 때문일까,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지난 18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는 문화연대, 민교협, 교수노조, 학술단체협의회, 전국대학인문학연구소협의회, 비정규직교수노조가 ‘노무현 정부의 학문정책 개혁과제’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고, 같은 시각 프레스센터에서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구성한 기초학문육성위원회가 ‘기초학문 육성의 중장기 과제’라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1주일 뒤인 25일에는 인문사회연구회가 ‘참여정부에 바라는 인문정책 방향’을 주제로 제 4차 인문정책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일주일 동안 비슷한 주제로 세 차례의 토론공간이 마련된 것.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세 개의 토론회는 조금씩 그 주제를 달리하고 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행사 주최의 위상 차이도 실감했을 것이다. 기초학문육성위원회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정책과제를 수행했고, 국무총리 산하의 인문사회연구회는 벌써 여러 번 인문정책 방향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문화연대와 교수단체가 주최한 토론회는 학계의 진보지식인 단체들의 의견으로 꾸려졌으니, 시작부터 이들이 가진 의견 차이도 짐작이 간다.

정치적 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로 모아졌다. 학술정책 개선이 필요하다는 요구와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제도 개혁이 시급하다는 것. 그러나 이 전제 아래에 있는 작은 주장들은 각기 그 층위를 달리하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대통령 직속 정책 기구 설립하라”

우선 문화연대가 주최한 토론회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학문정책 개혁과제’라는 주제에 맞게 다소 광범위한 층위를 다뤘다. 장기적인 학문정책이 없다는 현실 진단이 공통적인 전제였다. 대안은 장기적인 학문정책 수립 및 집행을 위한 대통령 직속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학진의 기초학문지원사업마저도 3년간의 단기 계획일 뿐이니 긴 호흡을 가지지 못하는 정책에 속이 탄 학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강내희 문화연대집행위원장이 말한 ‘학문정책위원회’,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가 제안한 ‘국가학술위원회’, 유초하 충북대 교수(철학)가 제안한 ‘학문정책위원회’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학진 개혁론, 교육부 개혁론도 불거졌다. 최갑수 교수는 학진이 지원기관이지 감독기관일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 아래, 학진의 연구지원기능을 따로 떼어 한국과학재단과 통합하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유초하 교수는 “교육인적자원부는 경제부처의 ‘인적자원’ 개념에 의해 교육이나 학문 본연의 기능이 훼손될 위험이 있다”라고 지적하며 개편을 요구했다. 제도적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관점이 저변에 깔려있다.

토론자로 참가한 조동일 서울대 교수(국문학)의 주장은 더 파격적이었다.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정규직’ 교수에게는 연구비를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는 연구교수 제도를 정착시키고, 학진 연구비를 모두 후속세대들의 인건비로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학술지원정책이 오히려 학문 풍토를 망쳐놨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장기적인 정책수립을 위해서는 제도개혁과 패러다임 전환이 필수적이라는 관점이다.

인문사회연구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도 많은 부분 비슷한 의견을 찾을 수 있었다. 인문사회연구회는 지금까지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사회적 활용의 틀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책심포지엄을 개최해 왔다.

“기초학문육성사업 계속할 필요 있어”

‘인문학 진흥을 위한 학문정책방안 모색’을 발표한 엄기형 연세대 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도 학문정책의 부재를 지적하면서 인문진흥원과 대통령 직속 ‘학문정책위원회’ 설립을 주장했다. 김경한 서원대 교수(영문학)는 ‘인문교육 확산을 위한 정책방안’에서 교양교육 강화로 해결의 가닥을 잡았다. 학부는 교양교육을 위한 곳으로 하고 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응용학문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교양교육 전담부서로 교양학부를 확대 개편하고, 인문학이 이 체제와 조직의 운영을 전담한다는 청사진이다. 고등학교 2년과 대학의 첫 2년을 묶는 교양교육 학사학위과정 제도를 마련해 중고등학교에서부터 인문교육을 제도화하자는 주장도 덧붙였다. 직업교육으로 치닫고 있는 대학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취업을 위한 학부교육’과 ‘교양과 연구를 위한 학부교육’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강내희 교수의 주장과도 닮아있었다.  

그러나 기초학문육성위원회가 제시한 전제는 분명히 달랐다. 3년으로 계획된 기초학문육성사업이 내년에 끝나게 되면 그것을 뒤이을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기초학문육성사업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필요성을 강조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지원정책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자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입장은 정부의 기초학문육성사업이 유용한 것이며, 그 아래의 세부적 세칙을 고쳐나가자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제시된 대안은 매우 구체적이다. 박찬승 충남대 교수(국사학)는 인문사회분야 기초학문 육성방안으로 ‘인문학 거점 연구센터’ 설립을 제안했다. 대형 프로젝트를 시행할 경우 연구팀들이 각 대학으로 분산됐기 때문에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구소’ 중심으로 대형 과제를 수행하면 연구가 안정된 형태로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 조인래 서울대 교수(철학)는 연구자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단독 연구 지원 확대를, 정윤희 포항공대 교수(물리학)는 후속세대가 안정되게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장학금 지원 확대, 박사후 연구원 제도 보완 등을 대안으로 꼽았다.

이밖에도 학문후속세대를 위한 제도도 빠지지 않는 고민거리였다. 박사학위 소지자가 중고등학교의 연구교사직으로 옮기는 방안, 국가학술원 및 연구단체 설립 등 연구교수직을 확대하는 방안, 장학금 지급 및 박사 후 과정 개선 등의 대안은 매 토론회에서 제기됐다.

정부와 학문공동체, 그리고 민간의 역할

서로 다른 차원을 논의하는 학계의 목소리 속에도 묘한 딜레마가 있다. 장기적인 학문정책을 요구하는 쪽에서 내놓은 대안은 크게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박사학위소지자들에게 교사자격을 주자는 주장만 해도 이미 여러 차례 제안된 사항이었다.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안 개정안과 방법이 모색돼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아직 추상적인 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제안을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전적으로 학진의 지원에만 의존해 기초학문육성방안만을 논의하는 것도 고민을 안겨 준다. 경제적인 지원을 확대해 가는 것만이 진정으로 학문을 위한 것이냐는 질문과 프로젝트 시행으로 인해 연구의 편중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기초자료 연구를 하면서 학문의 밑그림을 그려내는 학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연구비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프로젝트를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당면한 현실. 1~3년 사이에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초자료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기초학문 위기 극복과 학문정책 정상화를 위해 학계는 다양한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 당국에서는 이렇다 할 밑그림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부의 강한 의지가 요구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민간 차원의 지원 통로를 찾는 것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학술정책의 방향 및 지원 모두를 정부의 결단에 의존해야하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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