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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다루지 않았다고 동양담론 비판 불가능한가?”
“불교 다루지 않았다고 동양담론 비판 불가능한가?”
  • 김진석 인하대 교수
  • 승인 2003.04.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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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 동양담론 비판’에 대한 박경일 교수의 논문을 읽고

‘오늘의 동양사상’ 봄·여름호에 실린 박경일 경희대 교수의 비판에 대한 김진석 인하대 교수의 반론이다. 김 교수는 박 교수가 자신의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고, 게다가 논쟁의 핵심인 해체론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독해를 기반으로 비판을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갖고 있는 본질적 맥락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김진석 교수에 대한 박경일 교수의 반론은 교수신문 제272호(5월 26일자)에 실릴 예정입니다.)


이년 전쯤 필자는 김용옥의 노자 강의가 불러온 동양 담론을 비판 한 적이 있었다. 원래 특강 형식으로 발표된 글이 교수신문에 요약돼 실렸고, 그에 대해 몇 차례의 반론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동양학자’들이 지난 세기 동안 ‘서양’에 의해 반 강제로 당한 여러 상처에 대해 매우 민감하며 또 ‘동양학 전공이 아닌 사람이 동양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데에도 예민하기에, 논의가 생산적으로 가기 힘들다는 점을 느꼈다.
이미 십여 년의 기간 동안 서양철학에 대해 여러 비판적인 글을 쓴 후에 동양담론의 부분적인 허구성에 대해 지적을 했건만, 내가 서구 중심적 관점을 남용한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도가전공자 정세근 교수와 대담을 하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되도록이면 나서지 않으려고 작정했다. 동양학 전공자들이 애초부터 완강하게 ‘외부인’을 구분하는 상황이라면, 당분간은 비판적 접근을 하더라도 ‘동양학자’가 그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 대한 비판이 있으며, 반론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 취지를 무시할 수 없어 박경일 교수의 글을 읽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의 비판은 기본적인 수준에서 맴돌면서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첫째 이유. 그는 무엇보다도 내 글을 전혀 읽지 않은 채, 논쟁에 나서고 있다. 특강 형식에 맞춰 짧게 준비한 원고를 나는 정리해 나중에 ‘오늘의 동양사상’(제5호)에 실었을 뿐 아니라, 연관된 다른 글을 ‘사회비평’에도 실었었다. 그런데 박 교수는 논쟁을 한다면서 이 글들은 전혀 다루지도 안은 채, ‘교수신문’에 실렸던 특강 요약문만 가지고 난도질을 한다. 이런 폭력이라니. 생산적 논쟁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저열한 왜곡이며 선동인 것이다.
둘째, 그는 니체,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에 대해 이미 일반적 이차문헌에서 소개되는 수준의 질문을 제기한다. 마치 내가 이들을 모른다는 듯이. 1990년부터 이들에 대해 쓴 글을 전혀 읽지 않아서 내 관점을 이해 못하면서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내가 이해되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는 투정을 내내 하고 있다. ‘탈의 놀이’는 이미 오래 전에 데리다를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글이다. ‘탈탈탈거리다’를 비롯한 여러 표현의 맥락이 거기 있으니 읽어본 후에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데리다의 텍스트주의에 대한 비평은 ‘초월에서 포월로’에 있으니 읽기를 권한다. 또 철학이어서 이렇게 어렵냐면서 ‘해체중심주의’ 등등의 개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하는데, ‘니체에서 세르까지’를 읽은 후, 논의하기 바란다.
박교수가 정말 데리다나 나가르주나의 복잡한 해체적 텍스트를 공부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면, 내 글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투정할 일이 전혀 아니다. 초기의 내 글은 ‘해체’를 단순히 이론적으로 논한 게 아니라 실제로 수행했다. 그 글에 대한 호불호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또 이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읽고 이해하지도 못한다면 ‘해체적’ 글쓰기를 논할 필요도 없다고 자부한다. 이런 해체적 글쓰기를 한 후에 비로소 나는 텍스트주의로는 다룰 수 없는 문화권력과 문화정치의 차원에서 노자 담론을 비평한 것이다. 불교를 다루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타박하는데, 모든 주제를 한번에 다루라고 요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노자 담론에서 파생한 동양 담론을 비평한 것뿐이다.
셋째, 동양학을 한다고 다른 나라의 학자들은 그렇게 높이 섬기면서, 왜 한국어로 쓴 나의 철학적 글들은 무시하는가. 한심한 식민주의 아닌가. ‘초월에서 匍越로’와 ‘疎內론’은 단순히 서구의 해체론을 소개하는 수준을 넘은 한국어 텍스트다. 정말 동서양 사상을 비교하려면, 지금 여기의 살아있는 텍스트를 존중하라. 그렇게 하지 않고 불교와 동양에 관한 서양 권위자 운운하는 것은 허약한 연구자의 사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학을 전공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한국학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한국적 삶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동양 담론의 ‘허구성’이란 관점에서 내가 지적하고 있는 요체 중의 하나다. 맹목적으로 서양 텍스트를 숭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동양 사상을 숭배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또 어설프게 동과 서에 공통점이 있다고만 말하는 대신, 역사적 차이점도 말하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동양’, ‘서양’ 연구자는 따로 있을 수 있지만, 한국어로 쓴 살아있는 텍스트는 한국학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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