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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 펼치는 사람들의 廣場을 꿈꾸다
철학적 사유 펼치는 사람들의 廣場을 꿈꾸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4.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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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서평지로 『아카필로』 복간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

학문의 주체성이 강한 나라일수록 서평은 프로 대접을 받는다. 책에 대한 적평이 곧바로 문화의 주체성과 연결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수십년간 학문의 식민지를 벗어나자는 요구들을 하면서도, 전문적인 서평매체 하나 없는 우리의 현실은 학문의 식민지성을 이중삼중으로 인정하고 있는 꼴이다.
이런 풍토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신선한 소식이 들려왔다. 2년 전 철학아카데미라는 민간 철학사숙의 선생들이, 쟁론장을 표방하며 출범시킨 철학 전문 반월간지 ‘아카필로’가, 7호까지 내고 장기휴면에 들어갔다가 본격 서평지(반년간)로 복간된 것이다. 복간된 ‘아카필로’는 사상의 영역에서 나오는 중요한 학술서적을 통해서만 입을 열겠다는 전문지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담고 있어서 놀라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준다. 이른바 전문 학술서평지는 최초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철학아카데미 사무실을 찾아갔다. 최근 긴축재정을 하느라 인사동 사거리의 허름한 빌딩 6층에서 다시 더 꼭대기인 7층으로 이사해 어수선한 속에 ‘아카필로’의 편집주간이자 철학아카데미 대표인 이정우 박사와 마주 앉았다. 그의 책상에는 다음주 초에 인쇄에 들어갈 국내 최초의 학술서평지 원고들이 막판 교정에 한창이었다.

국내 최초의 전문학술서평지
“아카필로가 7호로 그만두게 될 때 재정난도 있었지만, 더 컸던 건 정체성 문제였죠. 계속 펴낼 명분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괴로워하다가 그만뒀는데, 요즘 학술서평지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란 생각이 들어 다시 시작하게 됐습니다. 예전보다는 훨씬 의미가 있는 것 같군요.”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카필로’는 특집, 대담, 집중서평, 해외서평, 학술정보 등 다섯 영역으로 구성된다. 머리에 해당하는 특집은 지난 6개월간 국내외 출간서적 가운데 모든 면에서 가장 중요한 책을 해부하는 코너다. 방식은 한권의 책을 여러 명이 각자의 관점으로 평하든지, 아니면 주제를 잡아서 여러 책들을 리뷰할 생각이다. 대담은 될 수 있으면 국내저자의 독창적인 작업을 골라서 대화하는 평가의 문화를 만들어보려는 것이고, 집중서평에서는 서너권의 묵직한 책들에 각각 원고지 1백매 분량을 할애해서 다루려고 한다. 해외서평은 반대로 권수는 많이 늘리고, 서평 분량은 30매 정도로 해서 양서들을 소개한다. 좀 성격이 다른 학술정보는 ‘80년대 이후 미국에서의 도가 연구’라든지, ‘철학 공동 연구의 현황’, ‘미셸 푸코 연구 문헌집성’ 등 철학연구자들에게 절실하게 와 닿는 지침들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준비를 하니 첫호는 3백페이지 정도 분량이 됐다.
“서평을 통해서 우리의 철학하기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게 목적이죠. 현재의 상황을 보면 막말로 산산이 찢어져 있습니다.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의 말로 우리의 것을 논의하는 문화가 없어, 철학적 사유를 펼치는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 필요하죠.”
서평은 논쟁의 발단지다. 즉, 제대로 된 비판이 서평의 오메가가 돼야 한다. 이 주간은 “우리 책의 모토는 비판은 학문적으로 하자는 것이죠. 비꼬는 식의 원고들은 안 받을 생각입니다”라고 서평의 기본원칙을 밝혔다. 그러나 필자들에게 특별한 주문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성심성의껏 써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이번 복간호의 원고 중에서 “지나치게 찬양한 글이 하나 있어 영 맥이 풀리는 글이라 싣지 못했다”라고 토로한다. 또 한가지 야망이 있다면, 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철저히 규명해보겠다는 것.
“우리나라 철학자들은 과거의 업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그걸 연구하는 게 철학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철학은 존재하지 않고, 철학사 연구만 존재하는 형국이지요. 철학이 창조적인 학문이라는 걸 보여줄 생각입니다.”
현재 편집위원은 이 주간을 포함해서 조광제(현상학), 박정하(서양철학), 류종렬(서양철학), 김시천(중국철학), 이현구(동양철학) 등 6명인데, 앞으로 관심을 보이는 학자들을 계속 영입해 ‘사상’의 전 영역을 감당할 생각이다.  난관도 많다. 우선 필자를 찾기가 그리 쉽지가 않은데, 이번 호 특집 ‘아나키즘과 코뮤니즘’도 원래 여러 명의 필자들을 동원하려다가 여의치 않아서 이 주간이 혼자 펜을 잡았다.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아나키즘)과 네그리-하트의 ‘제국’(코뮤니즘)을 묶어서 다뤘는데, 두 책의 주제를 감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문가들이 전부 못쓰겠다고 나왔던 것이다.

재정보다 필자 동원이 큰 문제
경제적인 문제는 “초반에는 후원금을 통해서 제작비를 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고료는 책을 판매한 돈으로 드릴 생각인데, 한 1천부만 나가면 무리 없이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주간은 밝힌다. 일단 학술서평지가 초유의 일이라, 학술진흥재단에서도 좋게 평가를 해주리라는 기대는 하지만 미지수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의 텔켈지가 했던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고 하자 이 주간은 그것도 좋지만, 가까운 일본의 ‘현대사상’ 같은 잡지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그에 따르면 월간지로서 드물게 ‘고차원다양체’ 같은 자연과학적이고 난해한 주제를 인문학적으로 소화해내곤 하는 이 잡지는 정말 대단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서점에 가면 ‘현대사상’을 위한 서가가 따로 마련돼 좌우종횡으로 가득 꽂혀 있으며, 심지어 10년 전의 책도 그대로 진열돼 있다고 한다.


“일본은 학자층이 우리보다 훨씬 두텁죠. 몇십년 전에 이미 희랍어를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이 4백명을 넘었다잖아요. 앞으로 ‘현대사상’의 도움을 받을 생각인데, 그 잡지에 실린 좋은 글을 번역한다든지, 아니면 그곳 필진에게 정기적으로 기고를 받든지 할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조력자는 이 땅의 학자들이다. 모처럼만에 생겨난 서평전문지가 최소한 20호 정도는 생명을 유지하며 확실히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필력으로 도와주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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