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5:50 (목)
연속인터뷰:그가 남긴 자리(4) 정진홍 서울대명예교수(종교학)
연속인터뷰:그가 남긴 자리(4) 정진홍 서울대명예교수(종교학)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5.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은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내는 과정입니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계룡산 산신제를 찾아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정릉에 있는 절에서 설법을 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종교학자’로서의 삶이었다. 지난 21일 오전 서울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퇴임 직후 꾸민 작은 연구실이었다.

△ 퇴임 후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대학에서 강의는 안 하시는데.
“퇴임 후에 대학에서 강의를 하겠냐고 묻기에 안 하겠다고 했지요. 나도 시간강사를 10년 넘게 했는데, 나이 마흔을 넘기고도 자리 못 잡은 강사들이 많잖아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은퇴하고 나서 시간 받고 강의하면 안될 것 같아서요. 나이가 들면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거든요. 어느 학교에서 석좌교수자리도 제의했는데, 젊은 사람 자리 빼앗는 것 같아서 영 편치 않아서 거절했습니다.
요즘은 철학연구소에서 ‘종교문화의 이해’라는 강의를 해요. 뜻밖에 대학에서 은퇴한 교수님들이 여럿 계시더군요. 전혀 다른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 모여서 재미있어요. 엘리아데를 소개하는 책을 쓰고 있고, 또 종교학의 키워드 50개를 뽑아서 에세이를 쓰는 작업도 해야 합니다. 1년 후에 출판한다는 데 보편적인 지식을 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흥분돼요. 밀린 일들이 많아서 당분간은 거기에 매진해야지요.”
△신학 일변도로 치우쳐 있던 종교학을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의 위상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종교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즉흥적이었는데, 어린 시절 종교단체 관련 기관에서 자라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대학이 영 자유롭지 않았어요. 뭘 질문하면 ‘그건 이단이야’라는 식이니까요. 질식할 것 같아서 어찌해야할지 몰랐죠. 그런데 엘리아데를 보고 나니까 종교를 불교와 기독교 등으로 보지 않아도 종교를 말할 수 있더군요. 문화 전반을 聖과 俗이라는 서술개념으로 재편성해서 보는 겁니다. 일상성 속에, 의미를 담고 있는 비일상성이 공존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문화를 보면 종교라는 것이 달리 이해되거든요. 종교라고 하는 것은 삶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론적인 주제가 되는 거죠. 사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학문의 주제는 인간을 읽기 위한 하나의 시각이지요. 정치학과 경제학도 그 시각으로 삶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어요. 종교를 보는 눈으로 정치를 보면 그 속에 경전, 순교자, 광기가 다 있어요. 그대로 종교현상이지요. 모든 것을 종교현상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학에서 못 보는 것을 보는 거죠. 그게 종교학이 할 수 있는 기여입니다.”
△평생 지녀온 문제의식을 정리하신다면 무엇입니까.
“조금 우회해서 말을 한다면, 왜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할까요. 그건 인문학을 지식으로 가르치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른바 인문학의 전통을 가지고 여러 가지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했으면, “저게 내 문제였구나, 내 문제를 선배들은 이렇게 생각했구나”라고 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지요. 물음을 스스로 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물음을 물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거죠. 물음을 가르칠 때는 그 물음에 대한 답도 준비돼 있거든요. 이처럼 얄팍한 게 어디 있습니까. 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아데를 공부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내가 가진 문제를 어떻게 반향해 주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면 엘리아데는 엘리아데로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재구성한 엘리아데만 와요. 그래야 될 것 같아요. 나는 내 맥락이 있는데, 어떻게 이것을 1백% 가져와요? 그래서 갈등이 많았지요. 그건 ‘학문이 아니라 에세이다’라는 말도 듣고. 타인의 지식을 모자이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필요한데, 이 문제를 평생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학문은 쉽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가장 쉬운 글을 쓰려면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처럼 써야해요. 그분들이 하는 말이 현학적인 내용이 아니거든요. 학문은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저렇게 표현해 보고,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동안 계속 치밀해질 수밖에 없어요. 상식적인 어휘로 묘사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낯선 단어들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전 학문적 글쓰기를 쉽게 해야한다, 무식한 사람이 어렵게 쓴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학문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거든요. 그런데 서양사람의 경험을 담은 개념어로는 우리의 경험을 그대로 담을 수 없어요.  태초, 처음, 시작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비롯함’을 정형화시켜보자, 몸짓이라는 말도 있는데 ‘말짓’, ‘마음짓’이라고 써보자는 의견을 냈어요. ‘짓’이라는 말이 행위를 나타낸다면 우리만의 독특한 의미의 결을 살려 우리 경험을 담아보자는 의도였어요. 그러면 친구들이 물어보죠. “그거 영어로 뭐라고 할건데.” 그게 학문적인 언어냐, 어떻게 검증되지 않은 언어를 쓰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내 경험을 어디에 담을지 몰라서 새로운 어휘를 만들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소통 불가능해지는 것을 언어의 ‘混淆’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굴절하는 문법과 표류하는 어휘, 이게 미로와 혼효입니다. 참 안된 삶이지요.
아예 새로운 어휘는 만들어내지 못했고 모든 글을 모두 존칭어미로 바꿨어요. 그랬더니 학문적인 책을 왜 그렇게 쓰냐고 묻더군요. 나이가 드니까, 가장 겸손하게 호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학문의 역할이라는 생각도 들고. 우리 언어가 가진 정말 좋은 문체가 있는데 왜 그걸 학문에서 배제하는지 모르겠어요.” 
△현실적으로 종교가 갈등을 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종교계 내부의 마찰도 종종 사회적 이슈가 되는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문화나 사회가 상당히 깊게 종교에 침잠해 있습니다. 종교는 사회적·문화적·역사적 추동력으로 현존하고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힘의 실체지요. 그런데 이런 현실을 직면하지 못한 채 종교를 문화나 역사 또는 사회인식의 영역에 포함시키지 않는게 우리의 지적 풍토입니다. 우리의 종교담론은 오직 개개 종교의 자기 주장의 논리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종교가 종교‘를’ 서술하는 ‘고백의 언어’는 있어도, 개인이나 사회가 종교에 대해 발언하는 ‘인식의 언어’는 없는 것입니다. 삶의 총체적인 맥락에서 읽혀야 할 종교문화가 여전히 개별 종교의 논리에 닫혀있는 겁니다. ‘종교’ 내부의 논리 또는 종교‘들’을 말하는 언어를 가지고 종교문화를 설명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런 역사적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겁니다.”
△서울대의 3대 명강의로 꼽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냥 떠도는 말이지요.(웃음) 예전에 민속박물관에 갔는데, 도리깨가 유리벽 속에 있어요. 내가 어릴 때는 일상적인 물건이었는데. 갑자기 나도 유리벽 속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내 일상이 거기 있으니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과장하면 반세기 차이가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역사’인 내가 발언한다는 것이 우습더라구요. 그래서 역사로서 경험을 다듬어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식은 책에 있잖아요. 그래서 저 혼자 독백하다 말았어요.(웃음)”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학문이 삶 자체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학문의 진정은 내 사람됨의 성숙함하고 같이 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학문이 공동체를 위해서 기여할 수가 없어요. 실존적 성숙과 병존하지 못하는 학문이 얼마나 많이 권력을 위해 종사해 왔습니까. 그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학생들에 의해서 깨지는 경험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나보다 새로운 세대를 사는 사람이고, 내가 꿈도 꾸지 못할 미래를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들에 의해 내가 끊임없이 깨지면 내 문제를 새롭게 정의해 나가야합니다. 그래서 교수가 좋은 거잖아요. 그런데 자학인지는 몰라도, 요람 같은 학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지 유치한 면도 있는 것 같고(웃음) 또 하나는 지적 관심이 곧 학문은 아니거든요. 학문은 구체적인 천착의 작업을 통해 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자만하지 말라는 말도 전하고 싶네요.”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