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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들의 방정식
분자들의 방정식
  • 이창규
  • 승인 2003.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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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 시간

내가 가르치는 유기화학은 원래 생명현상과 관련된 물질의 생성과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유기’란 단어는 화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널리 쓰인다. ‘유기적인 관계’니 ‘유기 농법’이니 하는 말이 그 예다.

 그래서인가. 유기화학의 개념을 인간들의 사는 모습과 결부시켜 설명하면 학생들에게 이해도 쉽고, 기억도 오래 가며, 무엇보다도 이 과목에 흥미를 갖게 만든다. 특히 남녀 관계를 예로 들면 졸던 학생들의 눈에 금새 생기가 돈다.

나는 학기마다 성서의 ‘달란트의 비유’를 인용한다. 한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종 셋에게 각각 5, 2, 1달란트를 줬다.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종은 노력해 배의 돈을 벌었으나 1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뒀다. 돌아온 주인의 칭찬과 저주가 분별해 내려졌음은 물론이다.

이 비유는 마르코니코프 규칙과 세이체프 규칙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전자는 탄소-탄소 이중결합에 수소이온이 첨가될 때 수소원자를 더 많이 가진 탄소에 가서 붙는다는 것이고, 후자는 탄소-탄소 이중결합이 형성되기 위해 수소이온이 떨어져 나올 때는 수소를 적게 지닌 탄소가 수소를 빼앗긴다는 원리다. 성서 기록 당시에는 화폐의 단위였지만 영어로 ‘talent’라고 쓰니 재능을 의미한다.

 비록 ‘달란트의 비유’는 ‘미운 자식에게는 떡 하나 더 준다’라고 하는 우리의 정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이 비유가 기록된 전후를 아무리 봐도 단 1달란트도 받지 못한 종이 있었다는 말은 없다. 그러니 나나 여러분 모두 1∼5달란트 사이의 얼마를 받았을 텐데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므로 다음 시간까지 각자 노트에 자신의 달란트는 얼마인지 써오라고 하고 강의를 끝낸다.

‘달란트의 비유’는 내가 만들어 시행하는 강의평가 문항 중에도 들어있다. 나는 출석을 부르지 않는데 이 문항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은 학생의 설문지는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틀림없이 결석을 했을 테니까.

1977년에 교수가 된 이래 대개 30명 이상 수강 과목은 강의평가를 혼자 해왔다. 미국에서 TA를 하면서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한 흉내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유익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6∼7년 전부터 우리 나라 대학에 강의평가 바람이 불었다. 이는 대학교수들이 스스로 필요성을 인정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강의평가제가 있는 대학에 정부가 지원금을 더 준다는 기대 내지 유혹 때문이었다. 모든 강좌에 대해 획일적으로 10가지 문항을 5선다형으로 묻고, 그것을 인터넷에 입력하지 않으면 성적 조회도 안되는 등 불이익이 있도록 해, 평가가 우리 문화로 정착되지 않은 가운데 단 한번도 평가 기술을 배운 적이 없는 학생들의 손으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대학 전체의 평가가 시작된 처음 3년간은 내 방식의 평가를 고집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이중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뜻과 평가 방식도 해가 거듭되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OMR방식이던 것이 컴퓨터로 바뀌었을 뿐 문항은 그대로인데 그 신뢰도가 96%라는 어느 보고서를 보고 나는 강좌별로 만든 별도의 강의평가를 재작년부터 계속하고 있다. 단 한번의 휴강은커녕 교재를 다 끝내기 위해 10회의 시험은 저녁에 보고 0교시 수업을 무려 4주간 20시간이나 더한 내 강의에 대해 ‘교수는 보강을 성실히 했는가’ 라는 질문에 ‘보통이다’, ‘아니다’, 또는 ‘매우 아니다’ 항목에 표시한 학생들이 20∼30%나 되는데 어떻게 신뢰도가 96%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신뢰도가 그렇게 높으니까 강의평가를 교수의 승진, 승급 등에 반영할 것이라니, 이런 교육 실험들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유기반응을 일으키는 분자들은 참 정직하다. 그 분자들의 式대로만 세상이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는 또 강의를 이어간다.

이창규(강원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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