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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와 위트로 버무려진 悲哀의 가족사
재치와 위트로 버무려진 悲哀의 가족사
  • 이은정 기자
  • 승인 2003.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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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 풍경 : 연극 ‘代代孫孫’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 진하디 진한 핏줄에 역사를 새겨 넣는다면 어떤 색이 나올까. 개인의 삶에 투영된 우리 근대사의 질곡은 ‘설움’ 혹은 ‘한’의 핏빛으로 표출되곤 했다. 오는 5월 4일까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 ‘대대손손’(박근형 연출) 역시 4대에 걸친 조씨 일가의 삶을 거울삼아 우리 역사의 자화상을 비추고 있는 작품이다.

연극 ‘대대손손’은 지난 2000년 대학로에서 첫 선을 보였다. 당시 연극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들기도 했던 수작으로, 조씨 일가의 小史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서울, 일본, 청진, 베트남을 오가며 풀어내고 있다. 올해로 세 번째 올려지는 작품.
명문대에 입학했음에도 연극을 한답시고 집을 나와 라면으로 끼니를 잇고 사는 ‘일대’. 그의 아버지 ‘이대’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이다. 전쟁 당시 베트남 처를 두지만 결국에는 버리고 돌아오며, 집에서는 폭력 남편으로 군림하지만 베트남에서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할아버지 ‘삼대’의 인생도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무허가로 치과의사를 하다 일본인 기생과 사랑을 나누나 그마저도 배신을 당하고 버림받는다. 그리고 일제시대 일본인 밑에서 굽실대며 일하며 한 밑천 잡기 위해 혼신을 다했던 그들의 아버지 ‘사대’. 이처럼 조씨 일가의 가족사는 하나같이 비참하고 엉망진창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역사의 거친 결에 휩쓸려 다니는 모습이 이들 가족사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극이 무겁거나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연출가인 박근형 특유의 재치와 위트, 희극적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 있어 오히려 경쾌하기까지 하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훑고 올라가는 구성으로 사실과 다름없이 보이던 사건들을 모조리 뒤엎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극의 묘미와 반전을 더해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때로는 비애의 역사 속에 스며든 희극적 요소가 불편하게 엮여져 있기도 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아이러니컬한 기분을 던져주기도 한다.
이 연극이 2001년 재연됐을 때 연극평론가 이영미씨는 “박근형의 연극은 기존의 연극어법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유희적인 장면전환과 장난스러운 처리, B급 문화 같은 질감으로 처리된 토종 인디문화 같은 신선함과 충격을 준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소극장이 아닌 대극장에서 한번 더 재연되는 만큼, 예전 공연에서 인정받았던 ‘현실 비틀기’의 묘미 ‘2003년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담겨져 있는지 다시금 들여다보는 재미도 기대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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