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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반
영화의 배반
  • 황훈성 동국대
  • 승인 2003.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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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요즘 영화 매체를 이용해 문학 작품을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선생들이나 학생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다. ‘안나 카레니나’ 같이 며칠을 읽어야 겨우 독파되는 소설이 겨우 두 세 시간만에 그것도 시각적, 청각적 즐거움을 동반한 감상으로 예습을 마칠 수 있고 선생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 두터운 텍스트를 뒤져가면서 예를 들어 설명할 필요 없이 상호 쾌적한 분위기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이나 당대의 문화 현상 등을 논할 수 있다.

내 개인적인 향수체험에 따르면 이미 읽은 소설에 대한 영화화된 텍스트는 거의 예외 없이 불쾌함을 가져다 줬다. 최근에 공연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영화한 작품도 대본 작가와 연출가가 집요하게 몰고 가는 동성연애 코드에 의해 증발해버린, 피터 에피소드와 셉티머스 에피소드는 아쉽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전쟁후유증으로 환각과 실체, 生中死/死中生의 혼돈을 겪고 있는 셉티머스가 댈러웨이 부인의 실존적 대칭물로서 환기시켰던 생에 대한 도저한 통찰들이 송두리째 증발해버렸다. 

영화예술이 태생적으로 지닌 시간성의 한계, 연출가의 독단성에 의한 환원주의는 그 예를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하다. 언젠가 소피 마르소가 분한 ‘안나 카레니나’를 보다가 빠져 나오려고 몇 번이나 좌석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던 기억이 난다. 침을 마르게 하며 가슴을 뛰게 했던 수많은 장면들에 대한 감독의 안하무인격인 폭격은 분노를 넘어서 측은지심까지 들게 했다. 가령 안나가 모스크바에서 뻬쩨르부르그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소설의 묘사는 환상적인 시 그 자체다. 밖에서는 하얀 눈보라가 열차를 쓰러뜨릴 듯 휘몰아치고 열차 안 안나의 마음 속에는 사랑의 열풍이 그녀를 넘어뜨릴 듯 몰아치고 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그 사랑의 열풍을 잠재우는 방법으로 안나가 차가운 페이퍼 나이프를 상기된 볼에 피가 날 정도로 지긋이 누르는 장면을 제시한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없다.

그저 천박한 눈요기감으로 키티의 집에서 치뤄지는 무도회만 화려 웅장하게 스크린을 꽉 채우고 있을 따름이다. 
이 처럼 문학을 가르치는 한 방도로서의 영화예술 의존은 어느 정도 문제성을 지닌다. 특히 문학이란 것이 각 인간의 고유성과 창조성을 함양시키기 위한 상상력 훈련이라고 가정한다면 영화예술의 圖像性은 매우 반문학적이다. 이는 영화예술이 갖는 독특한 기호성 때문이기도 하다. 

소쉬르와 더불어 기호학의 양대 비조라 불리는 퍼스에 의하면 인간의 기호는 상징, 지표, 도상으로 나뉘어진다. 도상기호란 지시체와 기호사이의 관계가 유사성에 기초하고 있다. 가령 초상화는 대표적인 도상기호이다. 반면 상징기호는 지시체와 기호사이 관계가 자의성에 기초해 있다. 

퍼스의 기호론에 의해 예술 장르를 나누면 연극은 완벽한 도상예술이며 영화는 이미지 도상예술 그리고 소설은 완벽한 상징예술이다. 문제는 바로 영화가 갖는 독특한 그림자 도상성에 있다. 완벽한 도상성에 기초한 연극의 경우, 우리의 시선은 무대 위에 배회하는 실제 살아 있는 인물들의 표정이나 의상 배경, 소도구 등을 자유롭게 옮겨가면서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그림자들은 한정된(?) 스크린 속에서 연출가와 카메라맨의 시선에 의해 철저히 액자화돼 제시된다. 액자화된 스크린에 의해 관객의 상상력도 규격화된다.

소설은 상징기호로 이뤄져 있으므로 각자는 축적된 언어적 체험에 따라 마음껏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그 구체적 상상은 나만의 것이며 이 세상에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앞에 실물로 드러났을 때 우리가 품고 그렸던 진리와 미는 얼마나 왜소하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는가. 자의적 기호인 언어와 개별적 체험이 혼효된 문학 작품의 감상이 손쉬운 영화감상으로 대체됐을 때 우리 후손들은 액자틀에 박힌 상상력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황훈성(동국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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