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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을 사랑한 제국의 아니키스트
식민지 청년을 사랑한 제국의 아니키스트
  • 이규수 성균관대
  • 승인 2003.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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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 지음/정선태 옮김, 산처럼 刊)

자신의 사상과 사랑을 위해 나라와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일본 천왕을 암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黑濤會에는 박열과 더불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라는 일본 여성이 있었다.

‘無籍者’에서 혁명가 박열의 동지로

가네코 후미코는 독립운동가이자 아니키스트였던 박열의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이며 옥중아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無籍者였기에 가난과 설움으로 얼룩진 어린시절을 보낸 후미코는 가슴 따뜻한 조선인 유학생 박열을 만나게 된다. 무적자 여성으로 밑바닥 삶을 살며 온갖 무시와 학대를 당한 그녀에게 식민지 조선은 ‘확대된 자아’이기도 했다.

천황을 암살해야만 조선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박열을 도와 스물셋의 나이에 옥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인 여성 후미코의 ‘치열한 삶과 사상투쟁의 비극’이 한권의 책으로 우리 곁에 찾아 왔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대진재 때 조선인대학살을 무마하려고 일제가 조작한 ‘천황폭살사건’으로 박열과 후미코는 세상에 알려진다. 식민지 청년과의 사랑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후미코는 자기의 사상을 당당히 밝히는 법정투쟁으로 일본 근대사상사에 기억된다.

천황폭살을 기도하려던 박열의 투쟁은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개인적 무정부주의자’로 자처한 후미코가 박열과 달랐던 점은 천황제국가에 대한 투쟁이 무엇보다 일본 사회 최하층의 삶을 살아내야 했던 그녀의 ‘자율’을 건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가네코 후미코는 피식민자로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가 양녀로 입양하려고 조선으로 데려가지만 아버지를 비롯한 친가가 가부장적 서열의식이 강해, 가네코는 무적자와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당한다. 그녀는 피식민자의 우월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학대받는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을 자신의 처지처럼 이해한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고통스런 삶에 대한 자각은 후미코에게 정신적 독립의 계기를 마련한다. 도쿄로 상경한 후미코는 주경야독하던 가운데 조선인 사회주의자, 민족운동가들과 만나면서 ‘비국민’이자 가족제도의 희생물로 내팽개쳐진 자신을 발견한다. 이 무렵 우연히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그 시를 쓴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에게 매료된다. 어린시절 7년 동안 조선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후미코는 자신이 가족제도의 희생물로서 고통받으며 노예처럼 살아왔다는 것과 식민지 조선이 제국주의 일본의 희생물로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등가로 파악하며, 일본국가 시스템의 정점에 천황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일본 관헌은 간토대진재가 발생하자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고자 “조선인이 우물에 약을 풀어 일본인을 죽인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그러자 민간인들은 이에 편승해 자경단을 조직하고 잔혹하게 조선인을 학살한다. 조선인학살 면책구실을 마련하던 일제는 보호검속으로 잡힌 박열과 후미코가 ‘천황폭살’을 기도했다며 이들에게 대역죄를 적용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죄를 증명하기보다 법정공판을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는 ‘투쟁의 장’으로 삼았다.

 ‘미래를 향한 일본인의 가능성’ 보여준 삶

저자는 입수 가능한 사료를 종횡으로 구사하며 후미코의 삶을 현재적인 입장에서 치밀하게 파헤쳐 간다. 일본의 근대 프로젝트에 동원된 천황의 실체를 폭로하려 했던 박열과 후미코.
한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철한 전사로, 다른 한 사람은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로서 천황의 허위성을 법정에서 폭로한 근대일본의 주목할만할 사상가였다.

여전히 천황과 일본의 국가 범죄인 전쟁에 대한 사죄를 외면하는 일본에게 후미코와 그녀의 투쟁은 저자의 말처럼 “미래를 향한 일본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를 기대해 본다.

책을 접하면서 다년간 한국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저자의 옹골찬 삶이 후미코를 통해 절절히 투영됨을 느낀다. 참신한 기획과 성실한 번역이 돋보이는 한 권의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보다 훨씬 가혹했던 일본의 역사적 현실과 대치해 쉼 없이 자기 발견의 길을 모색한 후미코의 삶을 새삼 음미해 볼만하다.

이규수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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