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의 시대다. 역사인물의 사적인 삶, 인간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늘고있는 탓이다. 평전이 출판의 인기종목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이상, 그 장르적 성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왜 평전을 쓰는지, 좋은 평전과 그렇지 못한 평전은 무엇인지 짚어본다.
● 책들의 풍경 : 『김시습 평전』(심경호 지음, 돌베개 刊)·『호치민 평전』(윌리엄 J. 듀이커 지음 / 정영목 옮김, 푸른숲 刊)
좋은 평전의 조건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첫손에 꼽는 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장악력이다. 베토벤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이나, 로맹 롤랑의 평전을 쓴 츠바이크는 마치 대상의 내면에 들어가 독백을 하는 듯한 목소리로 독자를 흡입한다.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애정에서 읽는 이를 설득하는 감화력이 나온다. 사상가나 예술가의 평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제1조건- 서술대상과의 친화력
다음으로는 당대의 정치한 사회문화적 콘텍스트 속에 인물을 위치시키는 일이다. 정치가나 혁명가의 삶을 따라갈 때는 이 점이 중요시된다.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은 모택동을 둘러싼 중국 실세들의 혁명정신을 현지인들과의 깊은 친분 속에서 파악하고 서술한 명저로 꼽힌다.
사상가의 경우는 동시대인들과의 지적 교류를 얼마나 진실에 가깝게 잡아내느냐가 사실 생명이다. 레이 몽크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양차세계대전 사이에 오스트리아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벌어진 학자와 예술가들의 다양한 지적교류를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기가 비교적 공적인 삶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재기술하는 것이라면, 평전은 한 인물의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영역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다가가게 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를 보면 동성애자로 살아가면서 푸코가 받았던 사회적 냉대와 그의 이론을 긴밀하게 잘 연결시키고 있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또한 마르크스의 病歷, 돈꾸기, 도서의 배치 같은 사적 영역에 대한 분석을 통해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맑스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외국의 경우는 평전이 장르로서의 성격을 확고히 굳히고 있는 반면, 우리의 경우는 작가론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단 태생이 불순한, 평전으로 거듭난 박사논문이 많다. 이런 류의 책은 대부분 나고 자라고 죽는 지루하고 평면적인 일대기와 자료의 나열로 그치곤 한다. 도무지 평전에 걸맞은 서사전략이랄까, 아니면 상상력의 자유로운 운용 같은 것이 살펴지지 않는 것이다.
최근 나온 ‘김시습 평전’을 보면서도 이런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이 책은 본격 평전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긴다. 머리말을 보면 저자 심경호 교수가 이 평전을 쓰면서 겪은 마음고생의 내력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콩 한톨로 메주를 빚는 상황은 아닐지라도, 평전을 쓰는 데 필요한 신변잡기적인 기록의 빈곤 속에서 있는 자료를 나름대로 총괄하고 해석하고 되씹기를 거듭한 이번 작업은 의미가 깊다. 하지만 평전으로서는 그닥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을 것 같다.
제2조건- 상상력과 내러티브
우선 심 교수와 김시습 사이에 가로놓인 심리적인 거리인데, 두 사람은 강 兩岸에서 마주보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나름대로 문인으로서, 참여지향적 선동가로서, 유교와 불교를 연결하려한 철학자로서, 종합적으로는 자유인으로서 김시습을 다채롭게 조명하고 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김시습의 이미저리는 동영상으로 이어지지 못한 정지화면의 단면체로 남는다.
다음은 탄생-성장-고난-득명-죽음으로 이어지는 영웅신화의 서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아무리 김시습이라는 자유인의 내면에 육박하려고 한들 이런 로망스의 틀거리 속에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게 마련. 관직을 버리고 떠돈 유생의 방랑길에서 흔히 예상되는 피동적인 반응 말고, 김시습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역동적인 영혼의 설계를 살핀 흔적은 그리 많지가 않다.
평전에는 극적인 反轉이 묘미다. 이를 위해 허구적인 글쓰기 기법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학자들이 읽고 이해한 것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데는 사람마다 천양지차다. 그리고 이것이 평전에서는 크게 작용한다. 이 책은 매 페이지마다 김시습의 시편을 인용하고 분석하고 있어서, 논문인지 평전인지 헷갈리는 대목이 많다. 물론 자료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을 고려해도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많은 평전을 상재한 김윤식 교수의 경우도 좋은 평가를 받는 책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 등 극히 일부다. 국내에서의 평전쓰기는 아직까지는 글쓰기 형식에 대한 미개발, 그리고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이 갖고 있는 동양적 전통 때문에 점프할 때마다 걸려서 넘어지는 허들경기와 같게만 느껴진다.
제3조건- 세밀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
베트남 현대사를 연구해온 미국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가 20년의 각고 끝에 써낸 ‘호치민 평전’은 비교적 학술과 문학이 조화를 이룬 면모를 보여준다. 저자는 호치민에게 “반은 레닌, 반은 간디”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이 말만큼 호치민에 대한 평가를 주저하는 사회분위기를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발언이 따로 있을까.
저자는 유고의 티토, 쿠바의 카스트로 등 좌절한 많은 제3세계 지도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성공한 정치적 지도자로서 호치민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름을 50번이나 바꾸며 전세계를 첩자처럼 이동한 호의 일거수 일투족을 묘사하는 세밀성은 가히 압권이다. 베트남전 이후 호치민의 말년에 대한 서술이 빠져있어서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대상 장악력, 상상력과 내러티브, 묘사가 생생한, 평전의 진수를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