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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묻힌 대구지하철
전쟁에 묻힌 대구지하철
  • 김석수 경북대
  • 승인 2003.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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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본능적으로 임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답하면서 자신의 삶을 부단히 새롭게 고양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무의미한 사건들에 내맡겨진 존재가 아니라 부단히 의미를 쌓아나가는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과거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과거를 기계적으로 기억하기만 하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를 망각해버리기만 하는 존재도 아니다. 물론 인간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 때문에 과거를 망각하고 싶어하기도 하며, 때로는 지금 나의 삶과 나에게 다가올 미래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오히려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를 쉽게 잃어버리는 사람도,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도, 결국 자신이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할 현재와 미래를 무의미하게 처리해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는 그런 위험이 자리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는 과정 속에서, 작은 사건들은 큰 사건들 속에 묻혀버리게 되고, 그것마저도 일상화돼 점차 우리는 사건이 안겨다 주는 충격에 둔감해져 가고 있다. 마치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는 충격적인 사건들 하나 하나가 하나의 게임처럼 모니터에 떴다가 사라져 가고 있다.

이번 대구 지하철 사건도 이런 많은 사건들 중의 하나로 잠시동안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는 이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특히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야만적인 전쟁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던 이 지하철 사건이 국가적 차원에서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하고 또 다시 우리들의 의식 속에 지워져 가고 있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사건,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폭파 사건 등으로 인해 한 맺힌 혼이 구천을 떠도는 부끄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역사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고민하고, 또 그 문제점을 분석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채 그때그때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사건의 악순환을 근절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동안 미국의 무모한 힘의 논리를 개탄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반전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치고 또 세계적으로 소리쳤지만, 정작 우리 안에 일어난 부끄러운 반생명적 사건에 대해서는 전국이 결집된 모습으로 규탄하고,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새로운 실천 방안을 강구하는 데는 미약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이 사건이 대구가 아니라 서울에서 발생했더라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대구의 사건보다는 서울의 사건이, 서울의 사건보다는 미국의 사건이 더 중요하게 돼 가는 오늘의 사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지위에만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도 우열이 존재하는 것 같아 슬프기 그지없다. 중앙 언론 역시 이런 논리의 생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의 신문들은 그래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지역 주민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들을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 반해서, 중앙의 신문들에서는 이미 지워져버린 사건이 되고 말았다.

과연 현대 도시를 움직이는 거대한 동맥의 역할을 하는 이 나라의 지하철에는 이제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모든 제반 시설들에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성이 마련됐는가. 언제까지 우리는 모든 것이 잠깐의 바람이 돼버리는 역사의 가벼움과 무의미의 연속 과정에서 살아갈 것인가. 반전운동도 중요하지만, 우리 속에 일상화된 안전불감증, 생명경시현상을 규탄하고 정부에 대해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도록 요구하는 생명운동을 더 철저하게 펼쳐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이를 위해서는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일상화된 우리의 죽은 의식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변부의 작은 사건들 하나 하나에 대해서 정성을 다하는 주체적인 비판능력과 실천적 결집능력을 일궈 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과거를 현재와 미래 속에 생산적으로 살찌우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김석수 경북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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