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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리뷰 : ‘대우학술총서’(아카넷 刊)와 ‘한길그레이트북스’(한길사 刊)
총서 리뷰 : ‘대우학술총서’(아카넷 刊)와 ‘한길그레이트북스’(한길사 刊)
  • 고봉준 문학평론가
  • 승인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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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술출판의 도달점…분과학문의 낡은 틀 탈피해야

고봉준 / 문학평론가

지난 2001년 초 국내의 일간지들에 한 학술총서의 업적을 평가하는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1983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대우학술총서 5백권 돌파를 기념하는 내용이었다. 대우학술총서는 대우재단이 1983년부터 기초학문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한 출판사업이다. 본격적인 학술총서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대우재단의 이 사업은 국내 학문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총서의 기획 역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공동연구, 자료집, 해외 학술서의 번역 등으로 비교적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 1982년 김방한의 ‘한국어의 계통’에서 시작된 이 총서는 2001년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으로 5백권째를 돌파함으로써 국내에서는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장대한 궤적에 박힌 ‘옥의 티’
대우학술총서는 국내의 연구 성과인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해외 학술서의 번역이 양적인 면에서는 형식적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국내의 학술 연구 성향으로 인해 자연과학은 상대적인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서구 이론들의 광범위한 유입과 유행으로 인해 총서의 번역물들은 종종 학계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와 들뢰즈/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등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들의 상업적 성공은 극히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며, 대부분의 저작들은 초판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도 시내의 대형서점들에는 대우학술총서의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 서적들이 뽀얀 먼지를 머리에 이고 진열돼 있다. 대우학술총서의 경우, 몇몇 번역서들이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경우가 있었다. 들뢰즈-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와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물론 번역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특히 이 책들은 저자의 논지를 뒤집어 놓거나 원서의 체제마저 바꿔버림으로써 ‘오역’이라는 불명예를 벗기 힘들었다. 번역은 일종의 메타 언어이기 때문에 오역의 위험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몇몇 오역이 번역서는 물론 총서 전체의 질적 수준을 하락시킬 수도 있으며, 번역 역시 또 하나의 학문적 성과이기에 더욱 세심한 노력이 요구된다. 

대우학술총서의 구성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60여 권에 달하는 ‘공동연구’의 성과와 더불어 동양고전, 특히 우리 고전에 대한 소개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근대적 학문 체제의 벽을 넘기 위한 ‘공동연구’의 기획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 연구에 있어서 학제간을 가로지르는 획기적인 기획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학문 풍토가 여전히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낡은 구도 속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한편 대우학술총서의 ‘번역’ 부분에는 우리의 고전은 물론 동양의 고전들조차 포함돼 있지 않다. 이런 태도는 아카넷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최근 새롭게 기획된 ‘대우고전총서’는 칸트와 데카르트, 베이컨 등 서양의 고전들을 망라하고 있지만 동양의 고전들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동양의 고전을 배제하는 이들 기획의 저변에 서양을 학문적 준거로 삼으려는 우리의 낡은 습속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한길사에서 발간하는 한길그레이트북스는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을 집대성한다”는 야심찬 취지에서 시작됐다. 한길사 창사 20주년을 맞이해 시작된 이 총서는 시작 5년만인 2001년에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로 50권째를 돌파했다. 대우학술총서와 비교한다면 규모 면에서는 뒤지지만, 동서양의 고전을 폭넓게 소개한다는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기획이다. 이 총서의 특징은 원서의 번역에 초점을 맞춘 점이다. 그 동안 국내에서 번역된 학술서들의 대부분은 영어나 일어 등을 중역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그것마저도 완역이 아니라 편역에 그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인도철학사’나 ‘우파니샤드’의 예가 보여주듯이 그레이트북스는 철저하게 원서를 고집한다. 원고지 1만2천매가 넘는 ‘인도철학사’는 번역물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으며, 산스크리트를 번역한 ‘우파니샤드’는 6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는 번역자들의 능력이나 개인적 사정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번역에 대한 철저함과 집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넓은 시야와 편집정신 돋보이는 그레이트북스
그레이트북스는 우리들에게 낯선 표제의 고전들도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마누법전’이나 ‘바가바드 기타’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뿐만 아니라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나 홉스봄의 ‘전체사’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등은 한국의 번역사에서 남을 만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레이트북스는 또한 대우학술총서가 보여주지 못한 폭넓은 시각을 갖고 정약용의 ‘경세유표’나 이익의 ‘성호사설’,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도 펴냈지만 이 책들은 학자들은 물론 독자 대중으로부터도 외면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우리의 학문 연구가 기형적으로 성장해 왔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최근 동양의 고전들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학문적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 고전 연구에 비할 때 그것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현저하게 뒤떨어진 것 역시 사실이다. 고전이란 유명한 책이 아니라 학문 연구의 기초가 되는 자료이자 지적 재산이다. ‘플레이야드’나 ‘이와나미 신서’가 여전히 지식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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