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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총서들이여, 무거운 외투는 벗어 던져라”
“학술총서들이여, 무거운 외투는 벗어 던져라”
  • 박치완 한국외대
  • 승인 2003.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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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학술총서 : 프랑스대출판부의 ‘크세즈총서’

박치완 / 한국외국어대·철학

우리 문화 풍토에서는 위반, 예외를 잘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결과 내용보다 형식이 중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문적으로 말해 신국판(153×225mm)이 아니면 사람들은 이를 책의 반열에 넣어주지 않는다. 분량도 약 2백50여쪽에 육박해야 그것을 책다운 책이라고 생각하며, 또 반드시 색인이 있어야만 학술서적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형식을 벗어난 특별한 기획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니 이런 이유 때문에 특별한 기획을 해 욕먹기보다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그만이란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단적으로, 모험은 곧 위험인 셈이다. 솔직히, 이것이 우리의 ‘책 문화’, 특히 학술서적들의 패악이며, 저자도 출판사도, 심지어 독자까지도 이런 ‘무의식’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기를 원치 않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의 학술서적들이 대개 두껍기만 하고, 두꺼운 만큼 그 내용이 알차기보다는, 되려 독자로부터 외면 받고 또 읽히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렇게 한국의 학술서적들은 스스로 독자를 멀리하고 있으며, 해당 전문가들의 서고를 지켜주는 데 만족하고 있다. 오직 저자의 이름과 권위만을 앞세워, 문자 그대로 ‘전문적으로’ 제작되는 것이 학술서적들이란 뜻이다. 때문에 이런 책 문화 속에서 일종의 형식실험을 감행했다고 볼 수도 있는 1970~80년대의 삼중당문고, 을유문고, 삼성문화문고, 박영문고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작은 책들(120×188mm)’은 장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고, 단행본출판이 기승을 부리는 우리의 출판시장에서 이런 종류의 문고판들이 놓일 자리가 없다. 정확히, ‘우리식’ 판단기준에 따르면 문고판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는 그야말로 문고판 천국이다. 우리가 잘 아는 PFU(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프랑스대출판부, 1921년 철학, 역사, 문학 분야로부터 출판 시작)의 ‘끄쎄즈’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크세즈’는 1941년 뽈 앙굴방(Paul Angoulvent)에 의해 기획이 시작됐으니, 사람으로 치자면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도 아직 건재하고 있다. 제1호로 출판된 ‘생물학의 역사’(J.-M. Adam)를 필두로 1962년에 1천호에 이르렀으며, 1981년에는 1천9백호를 내고서 “1천9백권 중 최소한 한 권은 당신에게 관심 가는 책이 있을 것이다”라는 광고 카피를 쓰기도 했다.

3천7백호 눈앞에 둔 문화의 기념비
출판 분야만 해도 철학, 종교, 문학, 언어학,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 법학, 경제, 의학, 역사, 예술, 환경, 국제관계, 스포츠 등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인간에게 꼭 필요로 한 내용들에서부터 새로운 지적 모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전문가를 위해서는 물론 일반 대중들의 지적 욕구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모든 주제들이 총망라돼 있다. 최근에는 ‘20세기의 세계인구’(J. Dupa quier), ‘유럽연합은행’(M. Devoluy), ‘유아 정신병리학의 현대사’(G. Benoit et J.-P. Klein), ‘퇴직이후의 삶의 설계’(B. Palier), ‘공상과학’(J. Baudou) 등을 출판해내면서 ‘지적 욕구들’이라고 광고 카피를 바꿔가면서까지 독자들을 계속 유혹하고 있으며, 3천7백호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렇게 ‘크세즈’는 명실상부한 ‘지식의 백과사전’ 내지 ‘지식 공화국’의 면모를 갖췄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프랑스 지성계와 프랑스인들의 지적 수준이 이 ‘크세즈’ 총서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 그러기에 전세계적으로는 43개 나라에서 ‘부분적으로’ 번역될 수 있었을 것이며(우리나라의 경우도 탐구당에서 한 때 이 총서의 전체번역을 욕심냈다가 지금은 판매부진으로 계속적인 출판은 접은 듯하다), 자체통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약 1억6천만 권 정도가 판매됐다고 전해진다(www.puf.com 참고).

사실 우리를 놀라게 하며 주눅들게 하는 것은 이런 변함없는 출판의 역사나 수치도 수치지만 PUF에서 나오는 총서에는 ‘크세즈’ 이외에도 무려 2백60여종에 달하는 다른 총서들이 더 있다는 사실이다. 철학분야의 총서만 하더라도 ‘새로운 철학강의’, ‘위대한 사상가들’, ‘철학의 주요 물음들’, ‘철학적 논쟁’, ‘철학자’, ‘철학’, ‘철학함’, ‘오늘날의 철학’, ‘철학입문’, ‘로고스’ 등이 있고, 철학관련 학술지들에도 ‘철학’을 비롯해 ‘데카르트의 거리’, ‘이해’, ‘철학연구’, ‘인간탐구’, ‘사유’, ‘형이상학과 도덕연구’, ‘오늘의 마르크스’ 등이 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를 우리는 감히 ‘책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인에게 있어 책은 곧 문화요, 이들의 문화국으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몇 년 전 PUF가 재정위기를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온 지성계가 나서서 이를 수습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PUF는 프랑스 자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대규모의 출판사가 프랑스에는 갈리마르, 세이유, 갈릴레, 플라마리옹, 보르다스, 신생 키메를 포함해 부지기수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 같은 사람이 파리에 가면 소르본느대 앞에 위치한 프랑스대출판부 본점에 먼저 들르게 되고, 크세즈 문고판이 진열된 층에 가서 그 동안 어떤 책들이 나왔는지 프랑스에서의 지적 흐름과 동향을 살피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을 것이다.

조급증과 엄숙성에서 탈피할 것
출판의 역사에서 보자면 문고판은 염가, 대량보급을 기치로 내세웠다는 점 외에도 독자들에게 꼭 필요로 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책 문화의 혁명을 가져오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사실 인간이 세상 살아가는 데 ‘문고판 지식’보다 더한 지식이 필요할까. 일찌기 토마스 만은, “(…)그 정신적 자산이 레클람 문고와 관계없다는 독일인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라고 했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값비싼 전문서적보다 문고판이 필요하다. 프랑스에서처럼 대중이 원하고 찾는 책은 문고판(Livre de Poche)으로 재출판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지식은 소유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함께 나누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영국의 펭귄북스, 19세기 중반에 독일에서 시작된 레클람 문고나 그리고 우리의 가까운 이웃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 등에서 우리는 전문서보다 문고판이 대중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다(일본에는 8백33종의 크세즈가 번역돼 있으며 장 피아제의 ‘구조주의’가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런 외국의 출판사들에 비하면 우리에겐 사실 내세울 출판사도, 총서도, 문고판도 없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과장이 아니다. 한국의 모든 출판사의 모든 총서를 다 합쳐도 앞에서 살펴본 프랑스대출판부의 규모와 자존심을 이길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이 절실한 때가 아니겠는가. 정말 대중을 위해 필요하고 소중한 기획물이 장수할 수 있는,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저자를 위한 전문지식보다 독자와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작은 책 문화’를 만들어가자면 말이다. 독자는 해독·소통되지 않은 전문지식의 깊이보다 삶에 도움이 되는 폭넓은 지식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의 번역인문학이 진정한 인문학으로 자리잡기 위해서 출판계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출판계가 문화사업이라는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출판사의 문을 닫을 때까지 한 영역이라도 개발해보겠다”는 원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문고판마저도 번역에 의존하는 조급증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량 있는 저자들을 발굴하고 존중하며 독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 저자들이 직접 쓴 문고판의 ‘르네상스’ 없이 한국의 책 문화는, 삼중당문고가 그랬듯, 영영 경제논리에 휘둘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10년도 못 갈 책 몇 십 권을 내 놓고서 그것도 ‘총서’라고 호들갑을 떨 때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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