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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품종 소량생산의 춘추전국시대…지적 모험 이끄는 기획 약진
다품종 소량생산의 춘추전국시대…지적 모험 이끄는 기획 약진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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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총서 그 운명과 형식-학술총서의 출판지형을 읽는다

기획서평


학술총서는 바벨탑의 정신이 살아남은 특화된 지식의 영토다. 그것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올리려는 마음이요, 지식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원래부터 이렇게 대책 없고 무모하기만 한 것이다. 그 순수한 열정은 꺾일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기에 무모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전설 속의 바벨탑 꼭대기는 구름 밖으로 끊임없이 자라나와 신의 손을 잡지만, 여기 인간들의 지적 호승심은 성냥갑 쌓기처럼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세속적 깨달음과 융화된다. 그것은 마치 루카치적 의미에서 사라진 완전한 세계를 찾아나서는 인간의 고통스런 여정의 기록이며, 궁극적으로 다시는 고향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아프게 확인하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서사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국내 학술총서 출판은 전집단계에서 단행본단계로 옮겨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 사상전집이나 자료형 영인총서들이 전집의 성격이 강하다면, 홍성신서, 대우학술총서, 이데아총서 등 인문사회 분야의 인기종목들이 등장한 지난 20여년 동안은 단행본의 성격이 강해졌다. 전집형 총서는 시작부터 전체 규모가 정해져있고, 그 틀의 완결성이 뛰어난 반면, 단행본형 총서는 출판의 지적 산파술의 전형으로, 단일 주제의식 속에서 계속적으로 텍스트를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런 단행본성 총서출판은 학술분야에서 현재 소규모화된 양태로 지속되고 있다.

무늬만 학술총서인 경우 많아
먹물 냄새가 나는 출판사들은 대부분 대문짝 만한 총서를 걸어두고 있다. 그런데 가령 나남출판의 ‘사회과학총서’나 한울의 ‘한울총서’ 같은 경우 수십권에서 몇백권 분량에 이르고 있지만 총서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 많은 책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내적 질서가 살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대출판부의 ‘20세기 문명연구총서’나 역사비평사의 ‘역비한국학연구총서’처럼 비교적 지향성을 드러낸 경우에도 속을 들여다보면 총서의 제목이 카테고리 역할을 넘어서지는 않고 있다. 이런 경우, 총서라는 게 인문과학이니 자연과학이니 하는 학문의 분류와도 같다.
주제의식으로 뭉친 기획총서들도 드물지 않다. 잠정중단 상태지만 헤겔의 저술과 헤겔연구를 포괄하고자 한 지식산업사의 ‘헤겔학총서’, 거대담론이 꺼진 1990년대 초반 동서양 지성들의 사상적 포지션을 찾아나선 솔출판사의 ‘입장총서’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번역학의 안팎을 훑는 참신한 시도를 하고 있는 고려대출판부의 ‘번역학총서’,  한국노동정책연구소 부설출판사 ‘현장에서미래를’이 펴내는 ‘노동이론정책총서’는 전문화된 분야의 책들을 심화확대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입장총서는 한때 장서가들의 손길을 많이 탄 이데아총서처럼 인기가 대단했는데, 거기엔 포지션의 ‘P’라고 새겨진 총서의 정념이랄 것이 크게 한몫 했다.
이런 인기는 한국에 불어닥친 프랑스철학의 바람에서도 영향받았다. 루카치에서 벤야민으로, 벤야민에서 아도르노로 다리가 놓아지는 맑시즘적 휴머니즘에 대한 인문학도들의 학습과 이들 총서는 호흡을 같이 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푸코의 ‘광기의 역사’로 출발해 그레마스, 들뢰즈 등 후기구조주의를 연이어 번역한 인간사랑의 ‘현대프랑스철학총서’도 빠트릴 수 없다. 이 총서는 블란서제 담론의 몰락과 함께 주춤하다가 슬라보예 지젝의 저술을 연달아 펴내면서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고 보니 비교적 중장년에 해당하는 많은 총서들이 IMF 한파 때 도매상 부도사태와 맞물리면서 기력이 쇠했다는 게 새삼 상기된다.

당대의 문제적 인물들을 엮어낸다
총서의 세대교체 현상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국내 지식인의 지적 모험을 유도해내는 총서들이다. 삼인의 ‘동시대인총서’, 당대의 ‘당대총서’, 한길사의 ‘신인문총서’가 대표적이다. ‘동시대인총서’는 김우창, 리영희, 김동춘 등 중진소장을 막론, 지성의 푯대로 삼을 만한 이들의 유사한 주제의 글을 묶어서 펴내고, 송두율의 ‘역사는 끝났는가’로 시작한 당대총서 또한 이름처럼 당대적 문제의식을 두툼한 분량으로 전화시켜내는 기획성 총서라 할 수 있다. 삼인과 당대가 동시대성과 현장성이 강하다면, ‘신인문총서’는 총체성이 강하다. 이 총서는 미국, 아렌트, 나르시시즘, 노동운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사유의 체계를 성립한 소장학자들의 작업을 발굴해냈다는 점에서 야심만만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아카데믹이 강한 반면 권수는 아직 많지 않다.
인물보다는 사상이나 이론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는 이후의 ‘오퍼스총서’, 한길사의 ‘한길컬쳐북스’, 문학동네의 ‘모더니티총서’, 예문서원의 ‘한국철학총서’ 등이 있다. 그 중 ‘오퍼스총서’는 68혁명 이후 네오맑시즘적 문제의식을 담은 현대의 고전들을 펴내는 게 목표다. 수전 손택이나 에르네스트 만델도 목록에 올라있는데, 손택은 매혹적인 비평적 감수성이, 만델은 맑시스트로서 추리소설의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이 총서의 정신과 부합해 포함시켰다.

연구소와 출판사의 합작품들
연구소와 출판사의 협동으로 생산되는 책들도 국내총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성균관대의 대동문화연구원, 이화여대의 한국문화연구원, 고려대의 민족문화연구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세대의 국학연구원 등이 학술총서를 펴내는 대표적인 연구단체들이다. 이들은 모두 ‘국학’이라는 분야의 연구성과를 담는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성과를 이루고 있는 것은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와 소화출판사가 1995년부터 짝을 이뤄 펴내고 있는 문고판 ‘일본학총서’를 들 수 있다. 일본이라는 것에 대한 정신분석총서라 해도 좋을 정도로 기층탐구로 70호를 기록중인 이 총서는 일본의 이와나미총서 등 학술문고본 가운데 역작들을 가려 뽑아서 번역해왔다. 많은 이들이 이 총서에 속한 마루야마 마사오, 쓰다 유기치 등 저명인사들의 명저를 부담없는 분량으로 읽을 수 있었다.
자연과학분야나 경제경영 분야로 넘어오면 총서의 울창한 숲이 끝나버린다. 과학에서는 영림카디널의 ‘갈릴레오총서’와 경문사의 ‘경문수학산책’ 정도가 고작이다. 갈릴레오총서는 천문물리학이랄 수 있는 영역을 전문으로 취급하면서 8호를 기록중이고, ‘경문수학산책’은 결코 산책이랄 수 없는 복잡한 수학전문서들을 20여권이나 펴내고 있다. 수학에 대한 철학적, 기호학적 탐색도 있고, 수학과 음악의 연관에 대한 문화적, 과학적 탐색도 있는데, 경문사의 편집장 말로는 거의 팔리질 않아 계속 내고 있는 게 자신도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다. 교양독자층이 형성 안 된 과학출판에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으로 출발, 60여권이나 쌓아올린 범양사출판부의 ‘신과학총서’의 맥을 이을 후속주자가 없어 안타깝다. 경제경영분야는 세종서적이 하버드비즈니스스쿨프레스의 책들을 독점계약해서 펴내는 ‘HBSP총서’가 유명하다. 주로 최신 경영기법과 이론이 소개되는 이 책들은 하버드대를 거쳐간 경제학자들의 대중적 저술이 주류를 이루는데, 대학교재와 처세서로 양분된 경영서 시장에서 유일하게 교양서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안희곤 편집장의 말이 인상적인데, “미국에서는 대중적이랄 수 있는 이 책들은, 국내에서는 전문서 취급을 받는다”는 것. 그 만큼 경영상식이 부족한 우리의 현실이 이 시리즈를 학술총서로 인식하게 하고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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