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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性 위기의 시대, 생태계와의 조화로 대안 문명 모색해야”
“知性 위기의 시대, 생태계와의 조화로 대안 문명 모색해야”
  • 장회익 녹색대학 총장
  • 승인 2003.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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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녹색 사유의 실험-녹색대학의 문명사적 의미

오늘 이 시점은 문명의 위기인 동시에 지성의 위기이기도 하다. 문명의 위기라는 것은 현재의 문명이 이대로 지속될 수 있을지, 또 이대로 지속될 경우 어떠한 재앙이 닥쳐올지 아무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음을 의미하며, 지성의 위기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앞에 놓고도 분명한 지적 이해를 바탕에 둔 새로운 방향의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문명의 위기 상황에 대해 지성이 상대적으로 둔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우리의 감성은 오히려 이 불길한 예감을 좀더 일찍이 느껴 많은 사람들의 심정 속에 일종의 불안감과 함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리하여 문명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느끼는 일부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새로운 생활양식을 찾아 농촌으로 떠나기도 하고 또 자신의 생활근거지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형태의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에 착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이 지성의 강력한 뒷받침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감성에만 의존하는 노력은 초기의 열정이 식어가고 예기치 못한 시련에 부딪칠 때 회의와 좌절에 빠지기 쉬우며 또한 상황에 대한 지적 파악의 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에 이르기 십상인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적어도 문명의 전환을 시도하는 이 거대한 작업이 치열한 지적 고뇌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일 것이라는 점이다.

지적 고뇌가 필요한 문명 전환의 작업

이러한 점에서 지성의 최후 보루라고 할 대학이 어떠한 구실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하다. 현존 문명에 대한 투철한 반성과 함께 가능한 대안 문명을 모색해야 할 것이며 이를 현실로 구현해낼 새로운 교육을 수행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대학들이 이러한 기능을 해낼 수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기존의 대학들을 이러한 구실을 하는 대학으로 바꿔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구실을 할 대학을 새로 설립하는 것이다.

이 두 길은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미 있는 대학을 바꿀 경우 대학 설립이라는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대학을 바꾼다는 것은 많은 경우 새로 설립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반대로 새 대학을 만드는 경우, 대학 설립이라는 만만치 않은 작업을 하나하나 모두 새로 해나가야 한다. 또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기존 대학들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기는 하나, 제대로만 만들어낼 수 있으면 기존 대학들이 가진 병폐들을 답습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새 대학의 전형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력에 값하는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녹색대학을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녹색대학은 어떤 모습으로 꾸리려는 것인가. 첫째로 문명의 대안을 추구해 보려 한다. 기존의 대학들이 이미 잘못 가고 있는 문명의 틀 안에 편입돼 이를 오직 지속시켜나가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녹색대학은 이러한 틀에서 되도록 멀리 벗어나 새 문명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에 맞는 새 삶의 방식을 찾아나가려는 것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현대 문명의 가장 큰 병폐는 이것이 생태계와 조화를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녹색대학이 지향하는 일차적 목표는 어떻게 하면 생태적 조화를 회복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단순한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 삶을 통해 추구하고 익혀나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교육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기존 대학들이 지나치게 제도의 틀 안에 갇힘으로써 교육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교육의 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찾아보고 이에 맞는 방식으로 대학을 운영해 보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대학들이 엄청난 규모의 대량생산 체제를 형성하고 학생들을 마치 공장의 제품을 찍어내듯이 일정한 규격에 맞춰 생산해내는 가운데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학업 그 자체보다도 사회적 위세가 높은 졸업장, 혹은 자격증의 취득에만 관심을 가지는 현실에서 녹색대학은 기존의 모든 정형화된 제도와 교육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해 무엇이 진정 내실 있는 교육인가 하는 점에만 초점을 맞춰나가고자 한다.

사실 이런 두 가지 기본 방향을 녹색대학이 추구할 기본 원칙으로 설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 속에 구현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녹색대학에서는 지금까지 그 어느 대학도 취해 본 일이 없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획기적인 운영 지침과 교육 방식을 마련하고 있다.

첫째로 녹색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 사이의 차별을 최소화하며 함께 배워나간다는 자세를 견지한다. 학교 운영의 많은 부분에 학생을 참여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관 운영 기타 학생생활에 직결된 모든 것을 학생의 자치 활동에 맡긴다. 교과목의 설정, 학습내용의 구성 등에도 학생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학습 과정에 있어서도 학생들의 능동적 역할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학교의 방향 설정에 학생의사를 최대한 반영하고 이른바 ‘野壇法席’이라고 하는 대학의 최고 의결기구에도 이사회, 교직원, 후원회 회원들과 함께 학생이 교수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한다.

둘째로 대학과 연계해 생태마을, 지역 공동체 등을 결성해가면서 궁극적으로는 이 공동체가 자급자족적 생산 및 소비 체제를 형성하도록 한다. 학생들(대학 학부과정) 또한 전원 생활관을 통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며 그 교육의 일환으로 농사짓기, 집짓기 등 공동체의 생산활동에 직접 참여한다. 그리고 거국적 지원조직을 포함하는 광의의 대학 공동체(일명 녹색네트워크)에서는 자체 내에 통용되는 녹색화폐를 발행하고 대학 구성원들 사이에 이를 적극 권장함으로써 건전한 생산·소비생활과 함께 자급자족 체제를 굳혀나간다.

셋째로 분과학문 중심의 교육내용을 지양하고 학습의 내용과 삶의 현실 사이의 연계성에 지속적인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는 단지 실용성을 강조하는 측면 뿐 아니라 바른 삶의 방향을 찾아나갈 철학적 성찰이 함께함을 의미한다. 학과목의 선정 및 학습내용 구성에 있어서 교수의 전문성보다는 내용의 적실성과 통전성을 우선하고, 설혹 교수의 전문성이 이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교수와 학생이 함께 학습해나가는 자세로 이를 운영한다. 기존 학문의 성과를 최대한 수용·반영하되, 자연 그 자체를 실험실로 삼고, 생활 그 자체를 교재로 활용하는 새 학습 방법을 개발해 나간다.

넷째로 학생의 선발 및 졸업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시험의 성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병폐가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에 찌들어 인성을 피폐케 하고 지성의 바른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오히려 시험 성적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으로 건강한 학습을 해왔고 또 건강한 학습을 해나갈 학생을 확보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학생의 평가에 있어서도 상대적 우열의 표출을 최대한 지양하고, 학생들 사이의 상호 협동을 권장한다. 우수한 성취와 미흡한 성과를 날카롭게 구분하되 학습 및 격려의 차원에서만 이를 활용한다. 학생의 지적 능력 향상에 주안점을 두며 학점부여 및 학위수여에 대해서는 엄격한 질 관리를 통해 지적 성취의 수월성을 담보한다. 외적 압박이 아닌 오직 내적 충동에 의한 지적 수월성을 지향하는 분위기를 이끌어내며, 학생들의 성취 내용은 성적이 아닌 실적물(논문, 작품, 영상기록물 등) 형태로 영구히 학교에 보존한다.

자연 그 자체를 실험실로, 생활을 교재로

마지막으로 학생 수를 비롯한 학교의 규모를 일정한 범위 이내로 제한함으로써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도록 한다. 우리의 옛 서원, 그리고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전설적 개별지도 제도를 우리 방식대로 부활시키고자 한다. 또한 대학 구성원 모두가 광의의 가족 공동체 형태를 취하도록 함으로써, 뒤처지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동료들은 성심껏 보살펴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돕고, 앞서나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적극 후원해 그 능력을 더욱 신장시키도록 격려한다. 한마디로 그 누구도 소외됨이 없는 고향 마을의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

이는 물론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며 실험의 결과는 앞으로 확인돼야 할 사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난 한 달여의 실행과정은 이 실험의 성공을 예고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이 실험의 주역을 맡아 나선 학생들이 초기의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리가 설정한 목표를 향해 꿋꿋이 그리고 즐겁게 걸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밝은 미래를 예감하고 있다.

장회익
녹색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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