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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해석의 갈등』 (폴 리쾨르 지음, 아카넷 刊)
[깊이읽기]『해석의 갈등』 (폴 리쾨르 지음, 아카넷 刊)
  • 김동윤 / 건국대·불문학
  • 승인 2001.0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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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한다, 고로 존재한다”...‘서사적 자아’의 해석학 정초
데리다, 푸코, 들뢰즈, 라캉, 료타르 등 대다수 파리의 철학자들이 근대성과 계몽철학의 전통, 거대서사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해체하려 했다면, 리쾨르는 오히려 반성의 철학·현상학·해석학을 섭렵하면서 계몽기획의 철저한 완성을 주장하는 사상가다. 반성철학에서 시작한 그는, 자신의 사상적 계보를 후설의 현상학에 연결시키고, 현상학과 가다머의 해석학적 지평을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확장한다. ‘해석의 갈등’ 도입부에서 밝혔듯이, 리쾨르의 방법론은 ‘해석학의 문제를 현상학적 방법론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 시대에 성서주석학과 서지학, 법해석학의 혼융으로 태동했다. 리쾨르의 사상은 이러한 해석학의 전통에 착근하면서 자신만의 해석학, 즉 ‘나만의 자아’(le moi)가 아닌, ‘自己의 해석학’(l’herm neutique du soi)을 빚어낸다. 데카르트와 달리, 그에게 있어 자아인식은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리쾨르의 코기토는 ‘나는 이야기 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표현되는 ‘敍事의 코기토’다.

리쾨르에 있어 자기(le soi: 어떤 인칭도 대입가능한, ‘idem’이 아닌 ‘ipse’로서의 ‘자기’)와 삶의 경험이란 시간의 차원에서 이야기로 구성돼야만 이해·해석되는 자아다. 그의 표현대로, 우주적·물리적 시간이 ‘인간의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서술적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이야기는 시간 경험의 특징들을 형상화할 경우에 한하여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삶은 이야기로 재구성돼야만 의미를 획득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말하는 코기토의 핵심은, 자아는 시간적인 존재이고 서술을 통해서만 이해·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자폐적인 코기토와 달리 리쾨르 해석학의 ‘자기’ 개념은, 기호·문화·상징의 서사적 우회를 통해 구성된다. 가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분석대상으로 삼은 은폐, 억압된 리비도와 욕망 역시 근본적으로는 서사구조를 지닌다. 신경증의 언어적 치료가 가능한 것도 무의식과 성적 충동이 서사구조를 지니는 까닭이다. 한편으로 자아는 기호 뿐 아니라 이중적 의미를 지닌 상징을 경유하여 구성된다. 다성적 의미를 지닌 상징은 의미 창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술적 우회가 보다 보편성을 지니기 위해, 자아는 텍스트를 경유해야 한다. 구전성이나 대화성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텍스트는,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에 관해 말하는’ 문장(phrase)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다양한 서술형태를 포괄하는 유용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갈등’(1969)의 미덕은, ‘해석학적 자기’가 우회하는 기호·상징·텍스트 가운데 상징(특히 악의 상징)에 대한 이중 층위적 연구와 독법에 있다. 하나의 층위는 상징에 상당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엘리아데 류의 신학-시학-신화학적 독법이고, 다른 하나의 층위는 포이에르바하, 맑스, 니체,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懷疑의 읽기다. 이야기의 원천인 신화의 서사적 풍부성과 상징적인 다이내믹스는 인정하되, 신화를 둘러싼 허위의식과 거짓의 켜는 벗겨내자는 것이다. 상징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다. 리쾨르는 ‘언어가 자기와 다른 것을 향해 터져 나가는’ 상징의 창조적 역동성에 주목하면서도 상징, 특히 악의 상징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왜곡된 인간의 욕망구조를 밝혀내고자 한다.

‘해석의 갈등’에서 보여주는 리쾨르의 시도는 구극적으로 ‘나’라는 자아의 해석 문제로 이어진다.(부제 ‘해석학의 시도’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처음부터 일관된 기획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 기고했던 논문들의 모음집이다.) ‘해석의 갈등’에서 발원한 자아의 이해와 해석에 대한 리쾨르의 문제의식은 반성철학에 바탕을 둔 서사체계 전반에 관한 고찰로 이어지면서,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유토피아의 환상 속에서 난파하고 파편화되가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묻고 있다.

‘해석의 갈등’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의식은 결국,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대면의 윤리를 통해 서술적으로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무엇을?) 자아와의 대면과 성찰은 바로 ‘우리’에 대한 성찰인 동시에, 그것은 망각과의 싸움이며 기억에 대한 해석의 갈등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현재의 나와 우리가 항상 시간과 역사라는 ‘거인의 등에 올라타고 현기증 느끼는 난쟁이’(마르셀 프루스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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