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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따라 달라지는 신분…‘나 홀로’ 앓고 대화도 단절
업적 따라 달라지는 신분…‘나 홀로’ 앓고 대화도 단절
  • 손혁기 기자
  • 승인 2003.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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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기획] 계약제 이후 교수사회의 명암-1 : 학문공동체의 이상한 풍경

교수 계약 임용제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그 동안 대학들은 3번에 걸쳐 신임교수를 뽑았다. 임용된 교수들은 계약서에 명시된 교육, 연구업적을 채워야 교수직을 연장할 수 있다. 기존의 교수들과 신분이 다르다 보니 겪는 일도, 행동양식도 다르다.
교수신문은 이번호부터 격주로 대학 교수의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로 시작된 교수 계약 임용제가 가져온 교수사회의 명암을 짚어본다.

 

H대학에는 최근 3년 동안 세 종류의 교수가 생겼다. 2000년 이전부터 재직하던 교수들은 흔히 말해온 ‘사회적으로 안정된’ 교수들이다.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해마다 호봉이 오르고 최소한의 기준을 채우면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부교수에서 교수로 직급도 올라간다.

풍경 하나, 무늬만 교수?
2000년부터 2001년까지 2년 사이에 임용된 교수들은 조금 다르다. 재임용제도에 따라 신분은 보장받지만 월급은 연봉계약에 따른다. 1~2년 선임 교수들은 경력이 오를수록 월급도 따라 오르지만 이 기간에 임용된 교수들은 업적평가결과에 따라 월급이 오를 수도, 수년 동안 똑같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연봉을 계산할 때 호봉체계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상여금’이라는 리듬이 없을 뿐 연봉액수에서 선임교수들이 받던 것과 큰 차이가 없고, 승진을 못하면 다시 재임용 될 수도 있어 2002년 이후에 임용된 교수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2002년 교수계약 임용제가 시작된 이후에 임용된 교수들은 연봉뿐만 아니라 신분까지 업적에 따라 달라진다. 3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 이들은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가 될 때까지 적어도 네 번 이상을 계약해야 한다. 이때마다 요구되는 업적평가 기준은 이들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잣대다. 여기에서 미달하면 하루아침에 물러날 수밖에 없다. 중간 중간에 조교수, 부교수로 승진에 필요한 점수도 맞춰가야 한다. 또 업적평가기준은 해마다 조금씩 높아져 그들을 더욱 압박해 온다.  

풍경 둘, 반쪽 짜리 계약에 웃고 울고
학계 중진인 J대 L 교수는 요즘 신임 교수들을 보면 교수사회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해마다 나오는 논문을 보면 우수한 연구자인 것 같지만 ‘지식인’으로서 주어진 사명감을 다하려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교수들에 대한 평가기준도 연구비를 얼마나 많이 타오느냐, 해마다 SCI, SSCI 등에 등록된 해외 저널에 얼마나 많이 자신의 논문을 게재하느냐가 중요하다 보니 이것들만 채우면 ‘훌륭한’ 교수로 인정받는 풍토다. 과거에는 사회적인 문제로 교수들이 목소리를 내야할 때, 다른 교수들이 앞장서면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졌었는데 요즘은 ‘연구비’를 따오고 ‘논문 수’를 채우면 당당하다. 아니 대학 내부에서 교수들의 신분이나 제도와 관련된 회의에서는 오히려 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한쪽에서는 연구성과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학생들의 교육에 소홀하다는 지적도 있다. ‘계약직’이라서 그런지 대학에 대한 헌신성이나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몇 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후임교수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도입된 지 1년. 계약제는 적어도
“교수들의 ‘철밥통’을 흔들겠다”는 교육부의 목적은 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수사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긍정적인 측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계약제 도입을 두고 강하게 반발하던
교수사회의 목소리가 1년이 지난 현재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입 이후 교수들의 반발을 피해 간 것은 무엇보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존의 교수들을 제외하고, 신임교수들만을 대상으로 한 교육부의 정책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교수계약제가 연봉제를 강제하지 않아 진정한 의미의 ‘계약’이라고 하기 어렵고, 국립대학들의 적용방식이 재임용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보니 이미 신분이 안정된 교수들은 오히려 합리적인 ‘업적평가제’를 요구하는 추세다. 그러나 대놓고 나서지 못하는 계약제 교수들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개인적 계약’에 맡겨 놓을 수 없는 일들이 많다. 

C대학에 전임강사로 임용된 P 교수. 많은 사립대학들과 마찬가지로 C대학은 2002년 법개정 이전부터 계약제를 실시해 왔다. 2000년에 임용된 P 교수는 ‘시간’ 대신 ‘전임’이라는 호칭을 따내기는 했지만 수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P 교수가 임용된 첫해에 받은 연봉은 8백40만원. 한달에 70만원이었다. 그해 정부가 고시한 3인 가족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금액이다. 비단 P교수뿐만 아니라 신입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방 군소 대학들과 전문대학에서는 연봉 2천만원 미만인 교수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교수들이 대학에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이미 계약을 통해 합의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계약제로 교수들의 신분이 열악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비단 보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연봉 8백40만원, 신분 불안 갈수록 커져

지난해 설훈 민주당 의원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자료를 기초로 ‘사립대학 교원 임면 현황’을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1년에 새로 임용된 전임강사는 1천3백24명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1년 이하의 단기 계약을 맺은 사람이 16.0%인 2백12명이었다. 2002년 상반기에 새로 임용된 교수 가운데에도 전체의 63.1%(3백49명)가 2년 이하 단기계약이었다. 대학측은 이처럼 계약기간을 짧게 한 것에 대해 교육·연구능력과 학교적응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연구와 논문작성, 투고, 게재 확인, 논문발간까지 1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다. 결국 남는 것은 대학측이 요구하는 ‘교수상’에 부합하느냐이다. 달리 보면 ‘길들이기’ 위한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난 1월 교수신문이 하이브레인넷과 공동으로 전국의 정규·비정규직 교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천2백11명의 답변자 가운데 계약제와 재임용제로 신분에 불안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58.7%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계약제로 강의와 연구에 제약을 받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62.8%에 달했다. 계약의 기반이 되는 업적에 교수들의 관심이 쏠리다 보니 교수들간에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오기도 한다.

지방 국립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L 교수는 지난 학기말 학교홈페이지 게시판에 호소문을 올렸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멋진 교수들(2주 전에 일찌감치 종강한)은 인간적인 교수라 하여 필경 강의평가도 잘 받아서 연봉제니 계약제니 할 때 더 많은 보수도 받고 재임용에서의 탈락을 염려하지 않으면서 이 대학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명예와 권위를 휘날리고 정년이 될 때까지 껍데기뿐인 학생들과 어울려 국민들의 혈세를 다 자기 것인 양 즐기면서 쓸 것입니다”라고 성토한뒤 L 교수는 동료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곱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그는 교수나 학생 모두 편한 것을 선택한다면 당장은 이득일지 모르지만 결국 학생과 대학의 미래를 갉아먹게 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계약제’ 시대의 우울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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