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22:45 (금)
정치민주화와 학문의 종속
정치민주화와 학문의 종속
  • 홍성민 동아대
  • 승인 2003.04.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學而思

정권이 바뀔 때면 항상 정치개혁이 핵심과제로 등장하리 만큼, 우리 사회에서 정치민주화라는 말처럼 자주 쓰이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것을 실현하기가 왜 그리도 어려운가. 학자들의 분석과 전망이 수십년 전부터 있어 왔건만, 아직도 정치민주화라는 구호를 되풀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강고한 한국 보수주의 세력이나, 공무원 사회의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쉽게 거론될 수 있는 이유들이다. 때로는 시민사회가 아직도 성숙되지 못했다고 비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적들에 이의를 달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나는 다른 생각을 해보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민주화의 발목을 잡는 것은 어쩌면 외국 학문으로부터 유입된 잘못된 개념과 학문적 기준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인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인도는 식민지 경험을 통해서 서구식 정치를 수입한 바 있다. 정치제도는 물론이고 행정의 단위가 재편되는 방식도 모두 영국정치학의 이념(자유주의와 계몽주의)과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부터 인도는 중앙집권의 근대국가를 통치의 최대 목표로 설정하게 되는데, 그 부작용으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와 남’의 구분이 생기고 말았다.

전통적인 인도사회에서 종교적 기준을 근거로 민족정체성을 구분하는 관행은 존재하지 않았던 반면, 서구식 근대화 개념이 도입되면서 지역의 구분이 생기고 이슬람과 힌두교의 종교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게 됐다.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겠다던 정치권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인도를 오늘날처럼 처절하게 분열시키고 만 것이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달성한 이후에도 식민지 시절의 학문풍토는 전혀 바뀌지 않은 채 잔존하면서, 인도정치의 정당성과 효율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는 식민지상태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정치엘리트들이나 일반국민들의 문화적 가치관은 서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가히 이를 두고 ‘후 식민지 상태’라고 불러 볼 만하다.

나는 한국학계의 상황이 후 식민지 상태라는 혐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자주 의심스럽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국정치학은 미국식 언어와 학문풍토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어, 현실정치를 설명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1960년대 이후 근대화 정치이론을 수입한 이후 본격화된 미국유학과 미국대학의 박사학위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마치 대학이나 연구소에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취득해야 할 면허증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한국 대학의 90%정도의 교수가 미국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다면, 이들을 통해서 생산되는 수많은 정치담론이 일방적인 색깔과 내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최근 교수채용의 관행은 그 정도가 상식을 넘어서고 있다. 학문의 영역이 시장논리에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다는 처참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영어로 강의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명문대학의 교수가 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미국, 유럽, 국내 순으로 박사학위에 순위가 매겨져 교수채용에 보이지 않는 평가기준으로 작용하는 동안, 학자의 치열한 문제의식이나 원숙한 학문적 훈련 등이 평가받지 못한 채, 그저 영어회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학교수가 되는 오늘날의 분위기. 이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이라크 전쟁 상황이나 북핵 문제, 또는 보안법 폐지논의와 같이, 한국정치에서 대단히 미묘한 문제여서 단순히 서구식 효율성과 학문의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주제들을 놓고, TV토론을 하거나 신문의 칼럼을 쓰게 된다면, 그래서 한국인의 여론이 그들의 힘으로 주도되고 만다면, 인도가 겪어야 했던 불행처럼, 우리 사회도 국가와 민족이 분열되고 말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우리 학계에서 전개되는 상징적 폭력의 양상에 대해 학자들의 집단적 지성과 성찰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홍성민(동아대·정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