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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인연과 힘”
“책 한권의 인연과 힘”
  • 박노준
  • 승인 2003.04.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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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이끈한권의책-조지훈의 『한국문화사서설』

내가 조지훈 선생의 ‘한국문화사서설’(나남출판 刊)을 처음 접한 것은 1964년 늦가을이었다. 뒤늦게 군대생활을 마치고 다시 대학원 석사과정에 복학해 새로 공부를 시작할 때였다.

요즘은 전공서적의 출판이 자못 범람하고 있는 터이지만 그때는 학문연구의 축적이 빈약하고 출판문화도 구멍가게 수준이어서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가 눈에 띌만한 책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듯 지성계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시대에 ‘한국문화사서설’의 출간은 국학을 공부하는 학도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무렵 고전문학을 보는 나의 시각은 지극히 단순하고 외통박이 형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작품의 문학성만을 놓고 피상적으로 그 우열을 가리는 일에만 집착했을 뿐, 해석의 방법론도 정립하지 못했고 작품의 기저와 사상적 배경 등을 어떻게 탐색하는 것이 옳은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초입자의 미망을 이 책은 일거에 해소해줬다. 뿐만 아니라 정년을 코앞에 둔 요즘도 무엇을 성찰하다가 궁금하면 가끔 찾아보는 ‘현대의 고전’으로 나의 학문적 삶의 친근한 벗으로 남아있다.

‘한국문화사서설’은 우리 민족문화의 고유한 성격과 그 전개과정, 민족신화의 정체와 유형 그리고 그 특질, 샤머니즘을 비롯해 불교·도교·유교의 한국적 특성, 정치·종교·철학·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나타나는 한국사상의 전거, 미술과 음악 및 문학에서 추출된 우리 전통예술의 원형과 그 전개, 실학사상의 대두 이후 동학혁명과 개화당의 삼일천하를 거쳐서 갑오경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선인들이 꿈꾸며 행동에 옮겼던 근대화 운동의 경위, 개화가사로부터 광복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걸어온 가요문화의 발자취 등 실로 한국문화 전반에 대해서 다각도로 규명한 기초 인문과학서다.

주제별로 모두 18편의 논문이 6부에 나뉘어 실려 있는 이 책은 요컨대 한국정신사를 개관한 책이거니와 이전까지 인문학계에 이와 같은 도서가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 책의 시대적 가치와 의의는 스스로 자명해진다. 나의 경우 고전작품을 문학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사상과 종교 및 철학의 시각에서도 접근해야 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재삼 깨달은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다.

 나아가 저자의 넓은 학문적 세계에 매료되어 별도의 논문인 ‘신라國號연구논고’와 ‘신라가요연구논고’를 찾아서 읽게 됐고 이것이 계기가 돼서 마침내 향가와 고려속요를 전공하기에 이르렀으니 인연으로 말하자면 이렇듯 깊을 수가 없다. 한 권의 책이 지니고 있는 힘은 이렇듯 컸다.

유려한 문체를 겸한 논리적인 문장은 이 책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지만 그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바는 논제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접근방식이다. 조망과 분석, 전체와 부분의 체계적인 연결, 요점의 추출과 이의 도식화 등을 통해서 우리는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을 만나게 된다.

수록된 논문 가운데 ‘한국문화의 성격’을 예로 든다면 저자는 자연·역사·문화 등 크게 세 갈래로 나눠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밝히려 한다. 자연현상은 또 세 가지 관점에서 논의되는데 먼저 한반도의 해양성은 ‘낙천성→명상성’으로 연결되면서 ‘꿈’의 문화적 성향을, 반도성은 ‘평화성→격정성’으로 이어지면서 ‘슬픔’을, 대륙성은 ‘웅혼성→감상성’으로 흐른 끝에 ‘힘’의 예술을 생산해낸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크게 多隣性과 고립성으로 파악한 뒤 전자는 적응성→기동성을 거쳐서 ‘멋’을, 후자는 보수성→강인성으로 연동되면서 ‘끈기’를 빚어낸다고 했다.

이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기까지는 전거에 입각한 정연한 논리전개가 선행됐음은 물론이다. 저자의 다른 논문들도 형식은 각기 다르지만 그 發題와 핵심 논지의 파악 및 증명방식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에서 빠진 ‘멋의 연구’도 같은 선상에 놓인다.

‘한국문화사서설’이 나온 지 어언 40년이 경과된 지금 국학을 비롯, 인문과학 연구의 제 분야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따라서 이 책이 아직도 유일무이한 연구물이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다만 학문의 원류와 계통을 중시하는 인문학의 성격상 한국의 정신사와 사상사를 폭넓게 알고자 하는 이와, 또한 이를 토대로 국학의 여러 분야를 심도 있게 천착코자 하는 이에게 예나 다름없이 이 책은 좋은 참고도서가 되리라고 믿는다.

박노준(한양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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