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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국익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국익이란 무엇인가
  • 박설호 한신대
  • 승인 2003.04.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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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평

거창한 말이지만, 모든 학문 행위는 근본적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 사람 살려내는 일에 실리와 명분의 구분은 불필요하다.
며칠 전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책 15권이 한겨레신문에 소개됐다. 대학교수 두 분이 양서 15권을 선정해, 이를 공개했다. 플라톤의 ‘국가’는 공통적으로 1위를 점하고 있었다.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황당함을 느꼈다.

오히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명저가 아닐까. 모어의 책은 지루하지만, 자유의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명저라고 해서 반드시 수입품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든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은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탁월한 명작으로 손색이 없다.

왜냐하면 이 책 속에는 남한의 지식인으로서 느껴야 했던 고뇌 그리고 갈망 등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궁금해했다. 어째서 플라톤의 ‘국가’가 양서 목록 1위로 선정됐을까. 젊은이로 하여금 바람직한 국가 상을 파악케 하려는 의도 때문일까. ‘국가’ 속에는 바람직한 국가 상이 설계돼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책의 내용은 수직적으로 철저한 계층 구도로 이뤄져 있으며, 어투 역시 지극히 명령적이다.

‘국가’ 내의 지배 계급, 군인 계급 그리고 평민 계급은 철저히 구분돼 있다. 더욱이 계급은 세습되므로, 계급의 일탈이란 있을 수 없다. 이보다 더 끔찍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체제 파괴적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불필요한 부류로 매도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국가는 평등 사회의 모델로서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서적이 명저로 인정받는 까닭을 납득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먼 훗날 사회를 개혁하려는 자들의 창조적 수용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예컨대 농민혁명을 주도한 토마스 뮌처는 플라톤을 거론하며, ‘모든 게 공동적이다 (Omnia sint communia)’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필자의 관심은 ‘국가’ 내의 군인 계급으로 향한다. 군인들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닌다. 첫째로 그들은 국가 내에서 체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평민들을 감시한다. 따라서 고대 국가의 군인이라는 개념은 오늘날과는 약간 다르다. 둘째로 군인들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게 하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한다.

그렇다면 외부의 적은 누구인가. 적은 다름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 다른 인종, 다른 영토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말하자면 성 밖의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적으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폐쇄성이 문제다. 폐쇄적 국가 시스템은 결국 오랜 역사 동안 끊임없이 국가 이기주의를 창출했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세계 국가를 주창한 것도 이러한 맥락과 관계된다.

왜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빵’을 차지하기 위한 욕심 때문이 아닌가. 인간 동물은 ‘황금’ 앞에서 ‘강도’로 돌변한다. 그러나 만인이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전쟁 동참의 원인은 어떤 두려움에서 발생하는지 모른다. 가령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추진하려고 한다. 통계에 의하면 남한 국민 다수가 파병에 반대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고압적으로 국민을 설득하려 한다. 여기서 설득의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설득해야 할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지, 남한 국민이 아니다. 이와 함께 시급히 추진돼야 할 일은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경고다.

도대체 국익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군인들처럼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일까.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사람들은 국익의 이름으로 1천5백만의 인디언들을 죽였고, 히틀러는 국익을 도모하기 위해 수백만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이라크인들은 죽더라도, 한반도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논리가 타당한가. 중동에 무기를 팔아먹으면서, 반전을 외치는 독일과 프랑스가 과연 평화를 거론할 자격이 있을까.

국가의 이익은 오로지 만국의 평화 추구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첨단 무기 앞에서 눈앞의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행위 자체가 어찌 어리석지 않겠는가.

박설호 (한신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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