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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는 도덕적 방기다
현실주의는 도덕적 방기다
  • 박순성 동국대
  • 승인 2003.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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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평

현대문명은 추상과 합리에 기초하고 있지만, 종종 捨象과 계산은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 인간사회의 질서가 안고 있는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처리하려는 태도를 어리석음이라고 한다면, 정의의 문제를 이익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자세를 간사함이라고 하겠다. 전쟁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며, ‘국익론’은 정치의 길을 벗어났다. 학살과 파괴 앞에서 전쟁의 비인간성, 부당성을 따지는 것은 이미 무력한 인간의 부끄러운 변명이 되고 말았다.

문명이 야만의 원인이 되고, 정치의 수단이 정치를 부정한다. 과연 21세기 인류 사회는 이라크전쟁이 던지는 이러한 경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한국 사회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형성해야 할 인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애초에 석유가 없었더라면

미국, 세계 인구의 약 4.6%가 살고 있지만, 세계 부의 약 50%를 소유한 국가. 이라크, 세계에서 석유매장량이 두 번째로 많지만, UN의 경제제재 조치로 국민의 6%가 넘는 1백50만 명이 죽어간 국가. 미국, 자유와 인권의 나라. 이라크, 독재와 전쟁의 나라. 그러나 미국은 전 세계에서, 특히 중동에서 독재의 근원이었으며, 세계 군사비의 거의 절반을 지출하고 있다. 심지어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에 속하는 생화학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모든 기술과 원료를 미국, 영국 등의 기업들로부터 수입했다. 대량살상무기 무장해제, 테러 예방, 독재자 교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라크침공은 석유전쟁, 패권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 개념의 혼란인가, 현실의 모순인가.

이라크전쟁은 석유에 기초한 20세기 산업문명이 인류에게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차라리 석유가 나지 않았더라면!” 이라크 민중의 탄식은 머지 않아 21세기 인류의 공통어가 될 것이다. 석유산업문명, 에너지 고소비사회의 한가운데에 미국이 있다. 이라크 민중들이, 그리고 그들과 다른 민중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군인들이 불과 모래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물에 목말라 할 때, 미국의 지도부는 밀실에서 석유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을 조종하고 있다. 어디 석유뿐이겠는가.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착취의 역사다. 석유전쟁의 끝에 또 다른 에너지, 죽음의 에너지인 핵을 둘러싼 전쟁도 기다리고 있다.

자연을 착취하는 문명은 인간 사회 자체를 분열시키고 억압을 만연시킨다. 경제와 문화의 세계화라 불리는 20세기말의 세계질서 변화는 빈곤과 갈등의 세계화였다. 삶의 다양한 양식은 부정되고, 세계는 하나의 억압체계로 재편됐다.

억압은 오직 폭력에 의존할 뿐이다. 새로운 패권체제의 최정상에서 미국은 첨단무기와 가상적을 끝없이 만들어내고 파괴한다. 문명충돌패러다임과 근본주의적 종교관을 결합한 단순화된 세계관은 이미 야만의 얼굴을 드러냈다. 불평등한 억압체계는 관용이 아니라 배제를 신조로 삼고,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보호한다. 이라크전쟁은 빈곤과 갈등의 세계화가 국가중심의 안보제일주의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자연 파괴와 착취, 불평등과 억압, 전쟁과 국가안보, 20세기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의 목록이다. 이라크전쟁은 감추어진 유산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21세기 인류사회에 준엄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평화 이전에 국익 말하는 뻔뻔함

이 준엄한 경고 앞에서 한국 사회는 21세기를 내다보지 못하고 20세기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스스로를 약소국가로 규정한 현실주의는 부당한 결정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도덕적 방기이며, 타인이 강요하는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자신이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자기검열이다. 개인이, 사회가, 국가가 도덕적 주체가 되지 못할 때, 이익은 누구의 몫으로 돌아갈 것인가.

평화를 말하기도 전에 국익을 계산하는 뻔뻔스러움이, 헌법정신을 돌아보지 않는 거칠음이 전쟁과 독재에 시달린 우리의 오랜 관습이라고 말하지 말자. 지금 우리는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외침을 듣는다. 부디 그들의 외침이 사라져 가는 생명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되기를, 훗날 평화로운 한반도와 새로운 인류문명을 위한 경종이기를.박순성 / 동국대·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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