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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노익장의 힘 과시한 원로들의 열정
[흐름] 노익장의 힘 과시한 원로들의 열정
  • 이은정 기자
  • 승인 2003.04.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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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지 내고, 新作 발표하고…나이 들수록 아름다운 老年

“성품 속에 어느 정도의 노인적인 것을 지니고 있는 청년은 믿음직스럽다. 청년적인 것을 지니고 있는 노인도 역시 좋다. 이런 규칙에 따라 사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결코 마음이 늙는 일이 없다”.

고대 로마의 뛰어난 문인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노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월이 건네 준 지혜와 청년의 열정이 함께 한다면 나이를 먹어도 결코 늙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년에 쓴 ‘노년에 관하여’는 키케로의 노인예찬론으로 노인에 관한 여러 통념들을 정연하게 반박하고 있다. 특히 ‘노년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그릇된 통념에 대해서 키케로는 항해를 예로 든다.

 
“다른 자들이 배의 돛대에 오르고, 통로를 뛰어다니고, 갑판의 물을 배수시킬 동안 노인은 키를 잡고서 조용히 고물에 앉아있지. 큰 일은 육체의 재빠름이나 기민함이 아니라 사려깊음과 영향력과 판단력에 의해 행해진다네.”

백발 노교수들의 ‘즐거운 학문’

육체적으로는 약해지지만, 무능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경험과 경륜으로 더 깊은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도주가 오래 됐다고 해서 모두 시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깊은 맛을 낼 수도 있는 법이다. 더구나 배움과 지혜가 주는 참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학교 업무 등 여러 구속에서 벗어난 노년이야말로 자신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세월이다.

최근 백발의 국어학자들이 동인지를 내겠다고 발표해 학계에 잔잔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1930년생),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1930년생), 정연찬 서강대 명예교수(1929년생), 이승욱 서강대 명예교수(1931년생), 김완진 서울대 명예교수(1931년생), 안병희 서울대 명예교수(1933년생)가 그들이다. 퇴임 후 학문적 관심사를 비공식적으로 공유해 오다가 ‘한국어연구회’라는 학회를 만들게 된 것.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동인지는 비정기 간행물로 1년에 한두 호씩을 내기로 했다.

‘한국어연구회’에 함께 활동하고 있는 이승욱 서강대 명예교수(국문학)는 “연구한다는 것이 끊어지거나 한 때 잠깐 몰아쳐 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계속 꾸준히 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일생을 함께 한 학문이기에 퇴임했다 해서 그 맥이 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난청으로 소리를 잘 듣기 힘들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을 꺾기에는 모자라다. “젊을 때 비하면 힘이 모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연구하고 공부할 힘은 남았다”라고 답하는 이 교수는 젊은 연구자와 진배없다.

유난히 문인 사이에서는 早老란 한낱 기우인 듯 하다. 아직도 수필가 조경희(1918년생), 극작가 차범석(1924년생), 소설가 이호철(1932년생), 문학평론가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1935년생) 등 많은 문인들이 왕성하게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 중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1926년생)를 빼놓을 수 없다. 1999년부터 토지문화재단을 꾸려가고 있기도 한 박 교수는 토지 완간 이후 근 10년만에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올 4월부터 연재할 계획을 발표했다. ‘토지’ 전 16권을 25년 동안 집필해온 인내와 열정으로는 모자란 것일까. ‘토지’와 함께 젊음을 보냈다면, 이 신작 소설로 노년을 함께 하는 셈이다.

박 교수의 한 측근은 “최근 신작 소설 집필활동으로 혈압이 안 좋아져 건강이 악화되기는 했지만, 건강이 어떻든 간에 글은 계속 쓰시겠다 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다”라고 인터뷰가 힘든 박 교수 대신 전한다.

건강관리·규칙생활이 삶의 활력

문학계뿐만이 아니다. 미술계에도 ‘노익장의 힘’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2000년 들어 ‘겸재예찬’ 시리즈를 선보인 바 있는 윤명로 서울대 명예교수(1936년생), 이대원 홍익대 명예교수(1921년생)가 대표격.
1977년 교직을 뒤로하고 전적으로 그림에만 몰두했던 권영우 전 중앙대 교수(한국화 1926년생)도 있다. 한지작업 1호 작가인 권 전 교수는 매년 4~5년마다 꾸준히 신작 개인전을 여는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근작 40여 점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 권 교수는 “틈나는 대로 작업을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힘에 부치기도 한다”라며 겸손을 보이기도 한다.

작년에 역시 전시회를 연 문학진 서울대 명예교수(1924년생)도 노익장이다.
“조각의 매력은 거칠고 단단한 돌을 쪼고 다듬으면, 곱고 부드럽게 변화한다는 점이죠. 이 매력 때문에 50년 조각인생이 한번도 지루하게 여겨진 적이 없었습니다.” 전뢰진 홍익대 명예교수(1929년생)도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진 조각가 중 하나. 전 교수는 지금도 하루에 4~5시간은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학교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작업하기에 훨씬 좋다”라며 말문을 연 전 교수는 “술을 자제하고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생활한다면 건강한 작품을 할 수 있다. 오히려 작품 활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병난다”라 밝힌다.

이러한 퇴임 교수들의 소식에 대해 이찬규 중앙대 교수(국어학)는 “퇴임 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후배 교수로서 학문적 열정의 끊임없는 지속을 보여주는 듯해 존경심을 갖게 된다”라고 말하며 “학문을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의 직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로서 바라보는 시각은 학문후속세대에게도 유의미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젊은이들보다 더욱 젊게 사는 노교수들.  이들에게 있어 ‘인생의 황혼’은 느릿느릿 해가 지는 저녁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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