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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어느 수사관의 오역을 추억함
<문화비평> 어느 수사관의 오역을 추억함
  • 배병삼 성심외대
  • 승인 2000.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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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31 00:00:00

오랜 세월 최고 권력자의 ‘하명’을 비밀리에 맡아 해결하던 이른바 ‘사직동팀’이 해체된다고 한다.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대통령으로서, ‘통치업무’의 효율적 집행보다는 그것이 드리우는 어두운 이미지가 더 부담스러웠는지 모를 일이다. 정치의 속성상 ‘손에 흙 묻히는 일’은 또 누구든 맡아야 할 터이니, 머지않아 ‘효자동’에서든 ‘삼청동’에서든 새 팀이 꾸려지지 않겠나 라는 비관적 전망도 없지 않은 모양이지만, 일단 오랜 적폐가 사라진다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 비밀기관(?)이 우리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구설에 휩싸이기는 지난해의 옷사건 때문이었다.

‘문화비평’적 맥락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은, 당시 사직동 팀에서 작성했다는 “옷사건 보고서” 속의 誤記였다. 다들 알다시피 그 보고서는 신동아그룹의 회장부인과 검찰총장부인간의 거래와 관련된 소문에 대해, 사직동팀의 수사관이 라스포사를 방문하여 조사한 내용을 최초로 기록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라스포사’를 시종일관 ‘라스포 의상실’이라고 써놓았던 점이었다. 왜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할 수사기관 보고서에, ‘라스포사’라는 이름의 끄트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거기에 있지도 않는 ‘의상실’이라는 말이 덧붙어야 했을까. 이거, 또 다른 의혹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기에 넉넉한 ‘문제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헌데 곰곰이 따져 보면, 이 문제적 표현 속에는 번역상의 문제들이 꼬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 그곳을 찾아갔던 수사관에게 ‘라스포사’라는 商號는 ‘라스포社’로 인식됐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 종업원들이 의상실 주인을 ‘사장님’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인식을 부채질했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사관은 끄트머리의 ‘社’자를 떼 내고 그 자리에 ‘의상실’이라는 職名을 덧붙였던 것인데, 이것은 그 나름으로는 ‘라스포사’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두려는 고충이 담긴 의도적 오역으로 보인다. 즉 ‘라스포 의상실’이라는 번역 속에는 ‘라스포社’가 무역회사나 스포츠용품 회사가 아니라 ‘옷가게’임을 摘示함으로써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깃들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新婦를 뜻한다는 이탈리아어, ‘LA SPOSA’는 일단 ‘라스포社’로 해석됐다가, 그 다음 ‘라스포 의상실’로 번역됐던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번역, ‘라스포 의상실’은 결국 지난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시대상을 축약한 옷사건의 와중에서 한낱 笑劇의 소도구가 돼 옳게 주목받지도 못한 채 넘어가고 말았지만, 실은 그 속에는 한 수사관의 치열한 해석학적 탐색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직동팀이 凋落하는 마당에, 그 동안 부렸을 권력기관으로서의 권한 남용과는 별개로 ‘라 스포사’가 ‘라스포社’로 그리고 ‘라스포 의상실’로 이중 삼중 번역되는 과정에 깃들인 번역자(수사관)의 고뇌는 우리가 추억할 만한 것이다. 최초로 사건 현장을 탐문한 수사관으로서는 사전지식 없이 보고서를 받아들 上官에게 현장의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이해시키려는 충정에서, 현상적 이름인 ‘라스포사’를 희생하고, 거기에 의미론적 번역을 감행한 것이다. 토마토를 처음 본 동양의 견문자가 ‘토마토’라고 표기해서는 그 과실을 이해하지 못할 동포를 위해 감연히 ‘서양 감’(西枾)이라는 오역을 무릅썼던 것과 같은 선상에서, 그는 외래어를 이 땅의 의미에 최대한 근접하도록 애써 오역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누가 이 ‘진정하고 성실한 오역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진정 부끄러운 것은 실패(오역)가 아니라 그 업무에 임하는 진정성과 성실성의 결여에 있다는 동기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 수사관의 성실성은 그의 실패를 훌쩍 뛰어넘어 잔잔한 감동으로까지 와 닿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독자에 대한 배려나 안타까움 없이 함부로 행해지는 번역작업이나, 외래어를 그냥 발음대로 한글화하는 추세(클릭, 포탈, 닷컴, 멀티미디어 등등)는 그 자체로 나태한 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동료이자 이웃인 독자를 소외시키는 짓이며 또 무시하는 짓이기도 하다.

이렇게 함부로 행하는 언어생활은, 한국어가 한국사람의 세계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힘센 언어’(영어)에 접속시켜주는 거간꾼이거나, 제 스스로 한국어가 사투리(方言)에 불과한 것임을 자복하는 꼴이 되고 만다. 구구하게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말끝마다 입에 달고서 말이다. 그러니 우연치 않게도 한글날, 책의 날, 문화의 달, 그리고 독서의 계절이 중첩된 이 ‘문화적인 달’에, 우리말을 생산하고 또 잘 다듬어 풍요롭게 만들 책임이 있는 대학의 지식인들에게, 한 수사관의 성실성과 진정성은 본받을 만한 미덕으로 와 닿는다. 이름 모를 ‘오역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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