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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장관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떼려면
문화부 장관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떼려면
  • 배병삼 영산대
  • 승인 2003.03.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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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옻칠장이의 꿈-문화는 副詞다

문화는 副詞다. 정치가 ‘正名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名詞라면 그리고 경제가 ‘살아있는 생물’에 비유된다는 점에서 動詞라면, 문화는 본질에 대한 형식, 또는 내용물의 장식이라는 점에서 부사다. 정치가 ‘폭력’이라는 돌멩이의 힘을 갖고 있고, 경제가 ‘유통’이라는 에너지의 힘을 갖고 있다면 문화는 부사에 불과하다. 특히 자본주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오늘날 문화는 기껏 정치를 장식하거나, 경제를 수식할 뿐이다. 요컨대 문화는 힘이 없다.

언젠가 박물관엘 들렀다가 ‘낙랑 유물 특별전’을 본 적이 있었다. 와당이며 봉니 같은 토기 유물들이 주로 전시돼 있었다. 심드렁한 눈길로 스쳐 훑으면서 지나가는데, 어느 구석에서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칠기 조각들이었다. 바탕의 나무는 바스러져 사라져 버렸고 그 위에 입힌 까만 색의 옻 조각만이 파편으로 남아 있었다. 낙랑이라면 漢나라의 조선 식민지이니 근 2천년의 세월을 헤아린다. 제 아무리 가볍고 단단한 오동나무 그릇이라 한들 나무로서는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을 터. 오로지 거기 덧칠한 옻만이 세월을 이겨내고는 도리어 바탕 나무의 결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나무그릇을 보호하고 모양을 낼 요량으로 덧칠했던 옻이 오히려 나무(본질)의 재질을 증거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형식(문화)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어찌 “문화가 힘이 없다”고 하랴! 하긴 문명이란 형식이 힘을 발휘하는 세계를 두고 이르는 이름이다. 가톨릭의 장중한 미사, 유교의 난만한 통과의례, 불교의 예식들은 모두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좋은 예들이다.

최근 새 정부의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 이창동 씨의 ‘파격’ 행보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취임 첫 날 영접나온 공무원들의 깍듯한 자세를 두고 ‘조폭문화’라고 일갈했다는 ‘구설’로부터 최근의 ‘취재지침’ 논란에 이르기까지 말들이 많다. 헌데 ‘문화비평’의 입장에서 주목할 점은 그의 문화에 대한 시각이다. 그는 벌써 문화에 대한 본질적 언급을 여럿 남기고 있다. 이를테면 “형식이 굳으면 내용은 살아나지 못한다”라는 가벼운 언급으로부터, “문화란 삶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본질”인데 “삶의 형식이 바뀌지 않으면 그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라는 본격적인 문화론에까지 이른다.

이 장관의 문화론은 요컨대 ‘형식이 내용을 이끄는 사회’, 또는 ‘문화가 정치경제를 이끄는 세계’로의 꿈을 선언한 것으로 읽힌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천 년 전 옻칠장이의 꿈을 잇고 있다. 그가 취임사에서 “‘문화도 돈이 된다’가 아니라, ‘돈 되는 문화, 돈 안 되는 문화가 따로 없다’는 사고로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서 끝내 “경제적 관점에서 문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야 한다”라고 주장했을 때, 그것은 이미 옻칠(형식)을 통해 그릇(본질)을 완성시키려는 옻칠장이의 꿈을 부연한 것에 진배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장관의 ‘파격’ 행보는 실은 잘 의도된, 세계 변화로의 첫 걸음이다. 한 일간지에서 스스로 문화부장관이 된 것을 배우가 “캐스팅 된” 데에 비유하고 또 노타이 차림의 파격이 “결코 쇼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 행동의 파장을 염두에 뒀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자신의 ‘파격’이 형식(문화)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본질(정치/경제)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겨냥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는 문화부 ‘장관직’이 처한 현실이다. 문화인이 형식을 짓는다면, 문화부 장관은 형식을 본질과 접속시켜야 한다. ‘아직도 문화인’으로서 그는 “문화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역설하지만, 그러나 ‘장관’으로서의 그는, ‘돈되는 문화’는 경제가 먹어버리고, ‘돈안되는 문화’는 정치에 종속되기 십상인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그 ‘점이지대’에 문화부/장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인으로서의 이창동 씨는 꿈을 문학과 스크린을 통해 실현할 수 있었다. 이 ‘부사의 세계’ 속에서 독자/관중들은 그의 표현을 그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문화부 ‘장관’으로서의 이창동 씨가 접할 ‘동사/명사의 세계’는 그의 미학에 감동해본 적이 없는 많은 ‘국민’들과의 만남이다. 독자/관중이 아닌 ‘국민’은 미학보다는 구체적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예컨대 취임사에서 “문화부가 먼저 권위주의의 두꺼운 철갑옷을 벗어던지고 부드러운 문화의 비단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라고 주문했던 그 ‘부드러운 비단옷‘이란 어떤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화는 여전히 부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오히려 문화부 장관으로서의 정확한 첫 발걸음일지 모른다.

배병삼
영산대·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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