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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로 끝났으면 하는 ‘고뇌’
기우로 끝났으면 하는 ‘고뇌’
  • 한완상 / 한성대 총장
  • 승인 2003.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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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총장실

평소에도 한국 대학의 서열화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단순한 대학의 서열화로 끝나지 않고 한국사회의 계층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이를테면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기존의 관례를 깨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위기를 더불어 대처하는 능력,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능력으로 서열화 된다면 오히려 그러한 능력으로 사회계층화가 이뤄져도 좋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서열화가 주로 암기력 위주로 결정돼왔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암기력은 무엇인가. 암기력은 ‘거기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다. 창조는 ‘거기 있는 것’의 관례와 틀을 깨지 않고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암기력에 뛰어난 사람들이 나라의 엘리트가 되면, 앞날이 그다지 밝을 수 없다. 인류역사에서 기념비적 발명이나 발견을 이룩해낸 분들은 예외 없이 기존의 관례를 과감히 뒤집어엎은 이들이다. 코페르니쿠스, 콜럼부스, 루터, 다윈,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등.

그런데 대학총장이나 교육부총리로 있을 때 나를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은 이같은 대학 서열화가 인간 서열화를 촉진시키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SKY대학 다니는 학생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늘꼭대기에 올라갈 듯한 뿌듯한 일류의식을 갖게 된다. 하기야 지나친 우월감은 열등감의 그림자일 수 있지만. 이른바 이류·삼류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이류·삼류 인간이라는 뼈아픈 정체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평생에 걸쳐 이 같은 자학적인 정체의식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킨다. 이것이 한국의 교육비극이요, 인간 비극이다. 이것을 시정하는 것이 인간화요, 교육개혁이요, 사회정의이다.

내가 학벌의 덕을 제일 많이 보았다 해도 객관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이른바 일류고등학교, 일류대학을 나왔고,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또 모교에서만 교수로 봉직했었다. 그런 뒤에 정부의 요직을 두 차례나 감당했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는 학벌의 혜택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내 삶의 전과정에서 나는 바로 이 학벌의 폐해를 그 중심부에서 누구보다도 더 격렬하게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울대학에서 두 번 쫓겨나고, 황량한 들판에서 8~9년을 보냈다. 외국망명생활도 해보았다. 군사재판에서 형도 받아 보았고, 교도소에서 짧게나마 죄수로 복역도 해보았다. 이런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군사권위주의를 뒷받침해준 한 기둥인 학벌주의를 몸서리치게 실감토록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나라의 학부모들의 인식도 문제다. 그들은 대체로 ‘일류대학입학=출세보장’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녀들의 조기과외수업을 위해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있다. 일년에 사교육비가 정부의 공교육비 총액보다 더 많다고  한다. 게다가 경제적 고통, 심리적 고통, 사회적 고통을 비용으로 합친다면 그 비용은 엄청날 것이다.

왜 이렇게 까지 대한민국의 공교육을 부실하게 만들면서,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교육비를 쏟아 부어야만 하는가!
십년 전의 일이다. 내가 통일부총리로 임명돼 첫 국무회의 하는 날, 24명의 국무위원들의 출신대학을 보니 꼭 삼분의 이가 S대 출신이었다. 검찰최고위층 33명의 90%도 S대 출신이었다. 바로 이 같은 현실을 학부모들이 너무 잘 알기에 천문학적 사교육비를 쏟아 붓는 것이다. 그들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왜곡된 기존의 한국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려면 혁명적인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교육부장관의 생명이 제일 짧았다는 사실이 이 같은 혁명적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나. 대통령 스스로가 국민의 교육 고통에 둔감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낀 고뇌였다. 이제 새 정부 출범에 즈음해 나의 고뇌가 기우로 끝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부터는 보통교육을 통해 인간이 보다 창의적이며 온정적 존재가 되고, 대학교육으로 실력있는 인재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국가의 총체적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은 암기고통에서, 부모들은 사교육비 고통에서 하루 속히 해방돼야 한다. 나라에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인재들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그러할 때 세계 일류 중심국가가 되는 꿈이 비로소 이뤄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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