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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으로 새긴 혁명의 정신
칼끝으로 새긴 혁명의 정신
  • 이은정 기자
  • 승인 2003.03.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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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 풍경] 중국현대목판화전-혁명에서 개방까지, 1945~1998
나무 위 칼끝이 파낸 자리에는 거친 날카로움이 번져있다. 그 날카로움은 몇 백장을 찍어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안에는 사회를 변혁시킬 힘도 내포돼 있는 듯 하다.

중국의 목판화는 당나라 이전으로 올라갈 만큼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창작’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阿Q正傳’의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루쉰이 주도한 ‘창작판화운동’에서부터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중국 농민들을 고려해볼 때,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어 제작과 배포가 용이한 목판화는 개혁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좋은 수단이었던 것. ‘나무판과 칼만 든 채 민중 속으로 들어가라’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이 운동의 중심부에 섰던 루쉰은 독일의 케테 콜비츠 등의 리얼리즘 작가들의 판화를 소개하고, 목판화 수업을 여는 등 활발한 목판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오는 5월 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현대목판화전-혁명에서 개방까지, 1945~1998’은 이러한 20세기 중·후반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국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판화가 어떠한 입지를 지녔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이는 1백여점의 작품들은 1945년 대전의 끝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등장, 1960~1970년대의 문화혁명기, 1970년대 이후의 개방의 시대까지 중국의 반세기를 아우른다. 각 시기마다 굴곡이 다르듯, 1940~1950년대는 착취, 억압, 노동 등 혁명의 테마가 주를 이룬다. 특히 민중들에게 좀더 다가가기 위해 전통적으로 가정, 일터 등에 걸어놓는 年華 양식 안에 새로운 이념을 담았던 연화 양식의 그림은 여간해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1960~1970년대의 판화에서는 건설·산업 현장, 농기계 등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크게 클로즈업된 트랙터나, 우뚝 선 송전탑은 사회체제의 변모를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이질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민중 판화가 오윤이 영향을 받기도 했던 자오옌니안의 ‘阿Q正傳’의 첫 장도 선보인다. 쏙 들어간 볼, 거칠게 파고든 선들은 농민 아큐의 ‘중국의 슬픈 근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예술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이 시대 중국 목판화는 지극히 선전적이고 정치적이라 낯설다. 하지만 그 이면에 녹아있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갔던 판화가들의 고뇌에 찬 미학적 가치를 발견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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