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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적 세계관의 대척점에 서있는 지식의 운명
계몽적 세계관의 대척점에 서있는 지식의 운명
  • 김융희 홍익대
  • 승인 2003.03.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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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고 : 내가 가르치는 秘學의 매혹

점성학과 수비학, 연금술, 카발라, 타로. 내가 지난 겨울 이화여대 대학원 학술강좌에서 강의했던 주제들이다. 오랫동안 다수에 의해 오해돼왔고, 소수에 의해 열광적으로 탐구됐던 ‘秘學(occult science)’이란 이름으로 통칭되는 체계들이다. 숨겨진 학술 체계라는 의미의 비학이 대학 내에서 공개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이 나 역시 조금은 놀랍고도 당황되는 일이었다.

명료한 이성의 합리적 담론이라는 외피를 걸쳐야 비로소 ‘학’으로 인정되는 밝디 밝은 이 시대에 ‘오컬티즘’이라니. 오컬티즘이란 악마신봉과 관련된 사이비 종교나 미신 또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꼬여내는 요설이나 사기로 폄하되지 않았던가. 내 안에도 그 오래된 편견이 스스로를 흔들어대고 주저하게 만들고 있는데 과연 이 지식체계에 대해 뭔가를 강의해도 되는 것일까, 의구심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 어두운 체계들에 꽤 목이 말랐던 것 같다. 서구의 오랜 전통 가운데 유독 실증적 합리주의의 유산에 필요 이상의 호의를 보여왔던 우리 대학 교육의 편향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실용적 학문들과 기술들에 가위눌린 호기심 많은 젊음 때문이었을까. 어찌됐건 강의는 본 학기의 수강태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열기와 진지함 속에 이뤄졌다.

우리를 그토록 끌어당긴 비학의 매혹이란 무엇이었을까. 비학이란 말 그대로 감춰진 서구의 지적 유산들로 수비학과 신성 기하학, 연금술, 점성학, 카발라, 신지학 등 대체로 신비주의 세계관에 뿌리를 둔 전통과 체계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비학의 매혹은 어쩌면 ‘감추다’란 뜻의 라틴어 ‘occulere’에서 비롯된 ‘occult’라는 수식어에서 비롯되는 지도 모른다. 

‘오컬트’란 우선 이 체계들이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감추면서 드러낸다’는 이중적 전언 방식으로 인해 붙여진 말이다. 그것은 세계의 진상이 형식 논리적 진리 표현과는 달리 스스로를 감추면서 드러내는 일종의 신비적 ‘秘儀’로 체험되고 전달되는 것이라는 기본적 관점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이 체계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하나의 기표에 하나의 기의라는 간단한 묶음으로 이뤄진 명료한 기호가 아니라 꽤 다층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상징적 기호로 이해된다.

이런 세계관의 배경에는 모든 존재하는 것이 하나로 통해있다는 전일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연금술의 시조로 알려진 이집트의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토스의 가르침인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도 있고, 안에 있는 것이 바깥에도 있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언명은 이런 세계관을 대표하는 문구다. 연금술이 단순히 금속제련의 차원을 넘어서 정신의 제련을 의미하는 것이나 하늘의 별무리가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 사건들을 빚어내는 인간의 내면의 반영으로 이해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계인식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신에 대한 이성적 신앙을 교리의 근간으로 삼았던 서구 역사 속에서 인간 스스로 초월과 영원의 담지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모종의 지식과 수련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겨졌고 결국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금기시되고 이단시돼왔다. 종교적인 제도 권력과의 마찰이 비학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한편 비학의 논법은 감각적 차원과 비감각적 차원, 또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아예 처음부터 허상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근대의 계몽적 세계관과도 대척점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인식의 주체를 합리적 이성으로 상정하고 감각기관을 중심으로 할당된 경험의 확실성을 전제로 세계를 이해해왔던 근대적 인식주체들은 직관적 세계인식이나 감성의 불투명한 지평에서 비롯되는 세계의 상징적 이해를 무지몽매한 환상이나 허상으로 폄하해 온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시대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신화와 환타지에 대한 열풍이 그렇듯이.

아마 오늘날 비학이 새로이 주목되고 있는 맥락도 이쯤이 아닐까 싶다. 강의실을 조용한 열기로 들뜨게 했던 힘은 아마도 오랫동안 합리적 이성의 작열하는 밝음에 가위눌려 잠깨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오래된 직관과 예감을 깨우는 낯선 이론들의 부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문지방에 서 있다.

김융희(홍익대 강사·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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