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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원리포트] 블랑쇼의 죽음에 부쳐
[해외통신원리포트] 블랑쇼의 죽음에 부쳐
  • 김유석 프랑스통신원
  • 승인 2003.03.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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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한계에 도전했던 중성적 글쓰기

지난달 25일, 프랑스의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097~2003)가 파리 근교 이블린 자택에서 향년 9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블랑쇼는 소설을 허구와 재현의 산물이라고 보던 기존의 시각을 타파하며, 20세기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는 오직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언론이나 대중의 주목에 대해서는 항상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늘 ‘고독과 신비의 작가’라는 수사가 따라다녔고, 세간의 이런 시선에 대해 블랑쇼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그 특유의 침묵으로 답했다. 사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것도 장례식 절차가 끝난 뒤의 일이었다. 프랑스 신문과 방송은 그의 삶과 문학적 궤적을 다루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모리스 블랑쇼는 1907년 12월22일 손 루아르 지방의 깽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의 비교적 안정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블랑쇼는 청년시절에 비단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는 1931년부터 1944년까지 ‘꽁바’와 ‘에꾸트’지에서 2백여 편의 우파 성향의 글을 기고하는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치활동에서 멀어지는 듯 했으나, 1960년대에 들어 알제리 전쟁 반대를 주장하는 1백21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그 후에는 1968년 5월 항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블랑쇼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밝히며 대중 선동에 앞장서는 전통적 의미의 참여 작가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블랑쇼에게 진정한 ‘앙가쥬망’의 시작은 문학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담보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변화된 의식을 표현하고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글쓰기의 탐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의 진정한 기능과 언어의 본질에 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던 블랑쇼는 이후 르네 샤르, 롤랑 바르트, 자크 데리다를 비롯한 프랑스의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블랑쇼는 “오늘날 문학의 문제는 경험 자체의 구성뿐만 아니라 그 역동성까지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질 수 있는 근원적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문학 창작의 본질적인 조건이 단순한 감각 경험을 넘어 지적 성찰을 통한 총체적인 경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블랑쇼의 이런 모습은 소설 창작과 함께 꾸준하게 수행된 그의 비평 작업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비평서들 가운데 주저로 꼽히는 ‘문학의 공간’(1955)에서 블랑쇼는 문학의 본질과 그 기능뿐만 아니라, 타자의 의식과 자의식이 만나 이뤄지는 언어와 대화의 문제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미래의 책’(1959)에서는 프루스트와 아르또 그리고 베케트와 같은 현대 작가들의 글에 나타난 의식과 사고의 자유로운 표현들 및 새로운 문체들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카프카에서 카프카까지’(1981)에서는 작가의 문학 세계를 검토하면서 그 안에 나타난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이렇게 비평과 수용이 조화롭게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블랑쇼 특유의 글쓰기는 말라르메, 로트레아몽, 릴케 등의 현대 작가들에 대한 독서 체험과 함께 헤겔, 니체, 하이데거 및 메를로-퐁티와 레비나스에 이르는 다양한 철학적 성찰에도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듯 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블랑쇼이지만, 그의 소설 세계는 다른 작가의 문체나 기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이며 성찰적인 성향을 띤다. 왜냐하면 블랑쇼에게 문학적 글쓰기란 매순간 생성의 조건과 경험의 강도가 다른 언어들 그 자체에 대한 독특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블랑쇼에 따르면 언어의 총체성은 모든 대상을 남김 없이 표현하고 전달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자신의 한계성과 불가능성까지 스스로 고발할 수 있을 때 실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인간의 현실과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언어에 앞서 존재하는, 침묵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그 나머지의 현실들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어가 갖는 이런 이중성 또는 굴절성을 블랑쇼는 ‘중성성’(la neutralite)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언어의 고유한 움직임 및 그 생성의 근원인 침묵의 세계를 듣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미 정해진 문체나 의미작용으로부터 그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언어의 중성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블랑쇼는 언어의 중성성 개념을 이른바 비인칭 소설의 세계로 주제화시켰다. 그는 작가나 화자의 개입으로 이뤄지는 사건이나 줄거리 위주의 전통적 서술 방식을 지양하고, 독자의 독서 행위를 통해 생성되는 텍스트 그 자체를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언어의 중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블랑쇼가 제기했던 것은 언어의 죽음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성에 대한 질문이었으며, 그를 통해 의미 생성의 무한한 근원을 탐구했던 것이다.

글쓰기의 전통적 규범을 거부하고 언표할 수 없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였던 블랑쇼의 중성적 글쓰기는 비평가들로부터 ‘파멸의 글쓰기’, 또는 ‘허무주의적 글쓰기’라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현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했던 언어의 한계에 몰두함으로써 텍스트에 내재된 빈 공간, 혹은 침묵 속의 외침을 우리에게 전달하려 한 것이다. 블랑쇼의 문학이 언어와 문화가 다른 외국 독자들에게도 호소력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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