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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애매성’
평화의 ‘애매성’
  • 이중원 편집기획위원 서울시립대
  • 승인 2003.03.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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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전쟁에는 언제나 명분이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명분은 공교롭게도 평화였다. 전쟁 없는 평화를 지속하기 보다는, 어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선택해 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를 정당화하고자, 전쟁 대상국은 ‘불의·악의 화신’으로 전쟁 주체국은 ‘정의·평화의 화신’으로 채색되고, 이에 필요한 화려한 이데올로기들이 동원됐다. 그러나 이같은 뻔한 정당화 논리 뒤엔 국가간 전략적 지배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 패권주의가 숨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흔히 평화를 ‘인간집단(종족·씨족 ·국가·국가군) 상호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외연에 대한 기술일 뿐, 내포적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평화의 내포적 의미는 사회·문화·정치·경제의 콘텍스트 안에서 제대로 읽혀진다. 그 안에서 보면, 평화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이념이나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무수한 인간집단들 간의 조화와 균형에 기초한 평화가, 하나의 이념 또는 소수 집단의 패권적 지위와 역할을 전제로 한 평화와 같을 수 없다. 이같은 애매함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어떤 평화를 원하는가를 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또한 그 애매함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에, 올바른 선택을 위해 감성이나 직관이 아니라 이성의 합리적 판단에 의탁해야 한다. 평화라는 동일한 표현을 쓰면서도 그 의미가 서로 달라, 대립된 행위들로 서로 충돌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오늘의 현실에서 이는 더욱 절실하다.

이라크 전쟁이 어떤 ‘평화’의 이름으로 치러지고 나면, 그 다음은 북핵문제로서 동일한 ‘평화’의 이름으로 그 해결이 모색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라크의 경우처럼 그 ‘평화’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다른 의미를 갖고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정치학자들의 우려는 이를 실감나게 한다. 미 부시정권의 외교정책이 ‘잭슨주의적 전통’에 근거해 있는데, 잭슨주의자들은 국제사회가 폭력적·무정부주의적이고, 따라서 미국은 이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강력히 무장해야 하며, ‘악의 축’과 같이 현실적이거나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세력들에 대해서 어떤 배려 없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표현에 안심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진정 평화의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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