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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야만의 극단
[딸깍발이] 야만의 극단
  • 교수신문
  • 승인 2001.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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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19 00:00:00
생명계 진화의 역사에서 복제는 기본 이다. 개별 생명체는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자신의 의무와 가치를 다한다. 때로 복제과정에서 변이가 생기고, 개체는 개량되거나 변형된 후손을 얻고, 종은 발전하거나 새로운 종으로 바뀐다. 개체는 복제의 통일체이지만, 동시에 개체 속에 있는 유전자의 또는 개체 바깥에 있는 종의 생존기계이다.
생명계라는 거대한 복잡체계를 구성하는 자기 복제자이거나 또는 생명 자체의 운반자일 뿐인 생존기계도 진화과정에서 발달해 스스로 분석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생존기계는 자신 속에 있는 유전자를 조작하고,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낸다. 생존기계 자체가 생존기계를 명령하고 생산하는 자리에 올랐다. 인간은 자연복제의 대상이면서, 인공복제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한정된 삶을 사는 개별 생명체에게 죽음은 중대한 일이다. 죽음이 중대하기에 삶에 대한 의미부여는 심각하다. 특히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는 삶의 엄청난 중압감을 버티어냄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수동적 정체성을 벗어나, 반성하고 행동하는 능동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목적이 됨으로써, 인간 생존기계는 생존기계라는 한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목적이자 도구이다. 개인이 인공복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할 때, 그리고 개체로서의 삶의 유한성을 극복해 버릴 때, 과연 생명 자체는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복제되어 나온 자기 자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가? 자신을 도구로 하는 행동은 선을 목적으로 한다지만, 인공복제가 추구하는 완벽한 인간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마음이나 정신에 대한 문제는 제쳐놓더라도, 인공복제에 대한 두려움은 근거가 있다. 과학과 기술이 지닌 불확실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조차 이미 인간의 지식 앞에서 자신의 불확정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생명공학, 바로 생명에 대한 과학과 기술의 결합체가 지닌 한계는 너무도 분명하다.
더구나 두려움의 심연에는 인간 사회 자체에 대한 공포가 놓여있다. 모든 인공복제는 사회질서의 망에 갇혀 있다. 약탈과 지배의 논리가 작동하는 인간 사회에서 생명공학은 미개한 사회윤리의 도전을 피할 수 없다. 인간 사회질서가 아직도 야만상태에 놓여있는 지금, 생명공학 발달 자체가 야만의 극단인 것이다.

박순성/편집기획위원·동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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