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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깊은 생각> 어느 노학자의 가을
<짧은 글 깊은 생각> 어느 노학자의 가을
  • 교수신문
  • 승인 2000.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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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31 00:00:00
박철호/ 강원대·농학
가을의 넉넉한 품에 안겨 자연의 사랑을 듬뿍 느끼며 들과 산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 사카모토 교수가 방한하여 함께 강원도 산골의 民族植物誌 조사에 나서게 됐다. 우리가 일본의 한 환경연구단체의 지원을 받아 한일공동으로 민족식물을 조사하게 된 것도 의의 있는 일인데다 조사를 다니면서 가을의 서정에 마음껏 취할 수 있고 나이 차에 상관없이 유명한 노학자와 학문적 교감도 나누게 됐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즐거움을 누렸다.
사카모토 교수는 가는 곳마다 열심히 셔터를 눌러내며 예의 가을정취를 카메라에 담는다. 방문객으로서 이국의 풍경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찬탄에서라기보다는 피사체가 그의 전공인 민족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두 흥미 있는 연구 자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각도를 바꿔가며 여러 차례 사진을 찍고 마을 사람을 찾아 그들과 식물과의 관계를 묻곤 한다. 민족식물학은 본래 민족과 식물의 관계를 취급하는 학문으로서, 같은 식물이라도 민족이나 나라 또는 지방에 따라서 어떻게 달리 이용되어 왔는가 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러니 어느 지역을 가나 중요한 연구자료인 자원, 사람, 풍습 등에 예리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카모토 교수는 올해 칠순이 훨씬 넘은 노학자이다. 그는 교또 대학에서 정년 퇴임을 하고 사립인 류고꾸 대학의 국제문화학과에서 세계의 식품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전공인 민족식물학의 연구를 위해 수시로 세계 여러 지방을 찾아다닌다. 평생을 갈고 닦은 학식의 결실을 거두기 위한 노력에는 정년이 없음을 몸소 보여준다.
나는 처음 학문에 접하던 이십 년 전에 그분께 전공에 관한 한 장의 문의편지를 드렸다가 그분과 귀중한 인연을 맺게 됐다. 그분은 그때 아무 것도 모르는 이국의 젊은 학생에게 정성껏 답장을 보내주고 참고문헌과 실험재료도 알뜰히 챙겨주었다. 그후 줄곧 서신으로만 교류를 하다가 재작년 여름 처음 그분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그때 손때가 묻고 오래된 수십 권의 기록장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는 것을 보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중에는 40여년 전에 쓰던, 내 나이보다도 오래된 기록장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외국을 다니면서 사용했던 낡은 지도는 얼마나 폈다 접었다를 반복했던지 금방 찢어질 것만 같은데도 책갈피에 고이 간직돼 있었다. 명색이 농학자인 나는 매사에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이 많고 기록하는 버릇이나 무엇이든 오래 보관하는 습관이 제대로 몸에 배어 있지 않은 터라 사카모토 교수의 좋은 습관은 꼭 배워야 할, 학문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로 여겨졌고 그러한 깨달음은 그해 여름의 일본여행에서 얻은 값진 수확이었다.
이번에도 사카모토 교수와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검소한 생활습관에서부터 남다른 학문적 정열까지 본받아야 할 점이 많다. 짧은 일정 속의 강행군이라 심신이 피곤한데도 항상 자상하게 여러가지 경험을 들려주며 빈틈없이 새로운 정보를 발굴해 가는 모습이 매우 진지하다. 작은 체구에서 빚어지는 그분의 언행을 보면 그분의 인생을 설명하는데 그리 많은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청년의 정신으로 학문에 정진하는 분’으로 충분하다. 그분에겐 ‘노후’란 있을 수 없다. 사카모토 교수가 보여준 삶의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가을의 의미를 발견한다. 나는 그 나이가 되면 후학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사카모토 교수와 같이 아름다운 ‘노학자의 가을’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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