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많은 옛 농장터에는 도립병원 서 있고…
사연 많은 옛 농장터에는 도립병원 서 있고…
  • 교수신문 기자
  • 승인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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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⑮

‘이름도 좋은 참 맑은 길(忠淸道) 하늘 고요(天安邑) 새 울음골(鳳鳴洞)의 씨농장’은 함석헌 일생에 지울 수 없는 큰 봉우리요 또한 나락(奈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이 바로 필자의 고향이었다는 사실도 단순한 우연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자란 천안읍 대흥동에 자리잡은 광제의원 안채 툇마루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만여 평의 옛날 씨농장 터에는 지금은 도립병원이 자리잡고 있다. 천안읍 대흥동의 광제의원은 나의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병원이었고 나는 그 집 큰아들이었다.

일제시대부터 그곳에서 자랐고 나의 머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광제의원의 옛 모습은 지금은 다 없어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 자리에 나의 바로 밑의 아우가 지금도 광제의원을 대이어 운영하고 있다.

일제가 지나고 해방이 되면서 옛날 일본 사람들이 세워 놓은 절 건물에 천안 성결교회가 들어섰고 그 교회의 장로였던 정만수님은 이발사였다. 젊어서부터 꾸부정한 어깨에 투박한 얼굴로 우리집 앞을 지나가던 정만수 장로님의 비교적 큰 체격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발장이로 푼푼이 모아 얻은 돈으로 일제 말에 사둔 만여평의 농토에 해방이 되자 과일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이루어 놓았다. 6·25 사변이 터지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폐허화된 이 농장에 움막을 튼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종전 후 이 과수원을 다시 다듬어 보려 했지만 이미 자리잡은 피난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말았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어쩌면 가장 힘센 사람에 속했을지도 모를 상이용사 김병태님이 뚝심과 힘으로 밀어부쳐 이 농장을 정리하여 그곳에 강당까지 짓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정만수 장로님은 함석헌의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를 읽고 거의 함석헌 광이 되어 있었다. 무식군자라던가 원래 불같은 성격에 주저할 겨를없이 함석헌 선생님을 찾아갔다.

천안읍 대흥동의 씨농장

그리고 무조건 천안의 봉명동에 있는 자기의 농장을 함석헌 선생님께 바치겠다고 떼를 썼다. 이발장이가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그에게도 자손도 있고 부인도 있었다. 그들에게 재산이 있다면 선생님 말씀대로 ‘장차 어두운 농촌을 비추는 등불을 켜보자는 뜻으로 남 돌아도 아니 보는 묵은 데를 사서 해방직후 과일 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했던’ 이 농장 밖에는 없었는데 그것을 난데없이 함석헌이라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바치겠다니 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함 선생님이 모르실 리가 없었다. 그 농장의 소유자 명의 변경은 끝내 사양하시다가 정만수 장로의 성화같은 간청에 못이겨 끝내는 두 분의 공동명의로 다시 등록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함 선생님이 천안 씨의 농장에 정식으로 내려가신 해는 1957년 3월로 되어 있으나 (전집 4:73) 그때까지 천안 농장에서 여러 번 모임을 가졌었고 많은 준비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천안 농고를 사직하고 서울 공대 화공과에 무급조교로 대학사회에 발을 디뎌 놓은 나였지만 내 생활의 대부분이 천안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농고는 그만 두었지만 월요일 화요일 이틀간은 천안여자고등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무려 13시간을 가르쳤던 일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이틀간에 13시간의 수업 그것도 화학, 영어, 독어 세 과목을 가르쳤다.

이 무렵에 천안 씨농장에 관한 일화를 나는 빼놓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유당 말기의 매우 어수선한 때였다. 당시 천안 출신의 국회의원 한희석 국회 부의장의 세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하에 호령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가 천안여고에서 가르친 학생 중에 한성애라는 공부를 매우 잘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리고 이 학생의 아버지 되시는 분은 당시 천안읍사무소의 한은영 부읍장이셨다. 한은영 부읍장의 아버님은 옛날에 목사님이셨고 아마도 이북에서 순교하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목사님의 아들이신 한은영 부읍장님은 우리집안이 나가고 있었던 천안중앙장로교회의 집사였다. 이과 같은 관계로 한은영 부읍장과는 상당히 가깝게 지내고 때로는 신앙에 관한 깊은 이야기도 서슴없이 나누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 한은영 부읍장님은 나에게 한희석 부의장을 한번 만나보는 것이 어떠냐라는 권고를 여러 번 해주는 것을 나는 묵살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라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그리고 천안 사람들은 한희석 부의장을 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당시의 한희석이라는 사람을 경멸하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봉명동 농장에 토지수용령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도립병원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 했다.

당시의 나의 심정은 형용할 수 없이 분에 차 있었다. 군청에서 함 선생님을 호출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군청 나무의자에서 기다리게 하더니 저녁이 다 되어서 군청 직원이 오늘은 그만 돌아가고 내일 또 나와 달라고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명령조로 농부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함 선생님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하고 허송하신 것이 분하셨던지 그 군청 직원에게 “아무리 무지몽매한 농사꾼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대접하는 법은 없는 것이라고 군수영감에게 전하시오”라고 말씀하신 후 돌아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군청에서는 야단이 났던 모양이다. ‘아니 그곳에 사는 농민 중에 저런 소리를 감히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라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수소문 해보니 그 사람이 함석헌이라는 농장 주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다음날 군의 계정이라는 사람이 돈 몇만환을 신문지에 싸가지고 함 선생님을 찾아왔더라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왜 돈까지 싸가지고 군직원이 함 선생님을 찾아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돈을 내미는 군직원을 일갈하시면서 돌려보낸 사건이 벌어졌다. 군직원이 돈을 싸가지고 왔다면 자기들의 조치가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일이 아닐까?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한은영 부읍장에게 한희석 부의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가 지난 다음 회답이 왔다. 당시 정치인들의 아지트라고나 할까? 남산에 위치한 외교구락부에서 어느날 점심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이제 겨우 석사를 마친 풋내기 대학 시간강사에게는 당시의 외교구락부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도리 없이 퇴계로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시발택시로 갈아타고 외교구락부에 도착했다. 한희석 부의장의 이름을 대니 그 순간 나에 대한 보이들의 친절도가 달라졌다. 그래서 어느 방에 인도되었다.

한희석 국회 부의장과 만나다

그런데 약속된 시간이 30분이 넘도록 한희석 부의장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화가 치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바깥이 떠들석하더니 미안 미안하면서 단신의 한희석 부의장이 들어왔다. 수인사가 끝난 다음 숨쉴 사이도 없이 함석헌이라는 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에게서 모른다는 답이 나오자 그래도 지역구 국회의원일 수 있는거냐고 다그쳤다.

 “지금 ‘함석헌’하면 대학생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으며 그의 강연회가 있다면 입추의 여지가 없이 청중이 특히 대학생들이 몰려드는데 그 ‘함석헌’이가 우리의 고향인 천안으로 ‘씨의 농장’을 이루고져 내려와 있는데 이 고장의 국회의원인 당신이 모른다니 말이 되는 것이냐”를 효시로 한 30분간 속사포식으로 퍼부었다.

“어찌하여 같은 부의장인데도 이제학씨는 욕을 먹지 않는데 당신만 매일 같이 신문지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느냐? 그것은 당신이 얄팍한 코밑에 진상 격인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빠져서 넓고 깊고 높은 정치의 길을 너무나 모르기 대문이 아니냐?” 이렇게 몰아 세웠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이제학이라는 분이 국회부의장을 한의원과 같이 하고 있었는데 이 부의장은 별반 화제에 오르지 않고 유유작작 정치의 묘를 살리고 있다고 보였는데 검정시험으로 고시합격까지 하고 일제시대에 군수까지 지냈다는 한희석 부의장은 매일같이 신문지상에서 야유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30분 가까이 상대에게 말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퍼붓고 있는 동안 두 팔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묵묵히 나의 잔소리를 듣고 있던 한희석 부의장은 참 오래간만에 너무나 신선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앞으로 종종 자기를 찾아와 좋은 충고 해주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물론 그 후로 한희석 부의장을 만난 일이 없지만 씨농장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팔짱끼고 묵묵히 앉아 있었던 한희석 부의장에게 머리가 숙여지면서 젊었을 때의 나의 경솔한 언행에 낯을 붉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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