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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이념들의 자리찾기…진정한 보수 규명 시도
왜곡된 이념들의 자리찾기…진정한 보수 규명 시도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3.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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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리뷰] 한국의 이념지도, 깊어지고 넓어졌다

최근 계간지 봄호를 보면 한국사회의 이념문제를 좀더 일상적으로 체화된 영역에서 세밀하게 따져보려는 논의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지난 50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어두운 구름이 어느 정도 걷히면서, 그런 획일적 놋쇠지붕 밑에서 삶의 형식으로 만들어져온 한국사회의 계급적, 세대적, 이념적 속살이 비교적 선명하게 내비치기 시작한 것일까.

특히 기득권 세력의 아집으로 삶을 역행시키는 보수가 아니라, 보수 계급사회의 요구를 이론적으로 세련화시킨 투명한 보수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어,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개혁의 급물살에 일방적으로 편승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런 점에서 ‘황해문화’ 봄호의 특집 ‘한국의 보수주의, 하나의 끝과 하나의 시작’은 적절한 타격점을 찾은 기획이라 할 만하다. 총 4편의 글 가운데 ‘보수주의의 이중적 변화와 일상적 보수주의의 등장’이라는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의 글이 주목할 만하다.

수구보수의 퇴장과 신보수의 등장

홍 교수는 두가지를 환기시키고 있다. 우선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수구, 보수, 진보, 급진으로 분화시켜 바라볼 때 보수와 진보의 진정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 동안은 수구의 논리를 보수의 논리로 포장했기 때문에, 보수의 목소리가 수구의 오명을 뒤집어썼으며, 자리잡기도 힘들었다는 지적이다. 홍 교수는 구보수를 보수영역에서 쳐내는 동시에 이 땅에 새롭게 등장한 보수의 논리로 일상적 보수주의를 들고 있다. 이 일상적 보수는 구보수의 기반이라고 할 반공주의, 군사주의, 국가주의와 같은 독재의 원리를 거부하며, 오히려 자유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보인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배금주의와 승자독식 원리를 따라 움직인다고 말한다. 유럽과 북미의 신보수가 이 땅에도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쟁점이 발생하는데, 보수와 진보 어느 쪽과도 결합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문제다. ‘사회비평’에 실린 유시민 개혁당 집행위원과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의 대담은 자유주의라는 것이 좌우파의 공통분모임을 강조하고 있어 시사적이다. 한국의 보수는 자유주의의 이념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개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환경, 제도, 관습, 의식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은 당연하게 들린다.

나아가 유시민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 영역을 진보와 동급으로 놓는 情義的 인식상황도 문제삼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집단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에 충실한 면과 경직된 면이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경계’의 특집 ‘이제 진보 담론의 실천이다’에 실린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의 글에 사용된 진보의 개념은 다소 급진적으로 읽힌다. 그는 “한국의 진보 운동은 오늘날 개혁적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해서는 물론 시민운동 세력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념적, 정치적 자립성을 견지하고 대항 권력을 창출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이 계급적으로는 옳지만 진보를 독점적으로 사용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한국사회 진보이념의 스펙트럼을 진보와 급진으로 넓히자는 홍성태 교수의 제안처럼, 김 교수의 진보 개념 사용 또한 급진적 진보로 정당하게 자리매김돼야 온건 진보 또한 그 자율적 영역을 ‘침해’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분법의 그늘을 사유한다

‘당대비평’이 마련한 특집 ‘이분법적 세계, 그 인식의 질서를 넘어’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친미와 반미’, ‘친일과 반일’, ‘체제수호적 통일과 반체제적 통일’, ‘국가와 개인, 공익과 사익’ 등을 이항대립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런 구도가 폐쇄회로적이며 동일한 논리구조를 띠고 악순환해왔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분법적 인식의 맹점은 지적돼 온바대로 폭력적인데, 그것이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것을 자꾸 한쪽 극단의 명제로 환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의 촛불시위를 반미운동으로 보도한 국내 수구언론을 통해 미국 언론들이 인식하는 ‘반미’는 “한국의 반미가 정치적 신념으로서의 반미라기보다는 일방통행으로 일관한 지난 50년 간의 한미관계와 우리의 대미 콤플렉스를 교정하려는 역사적 요구”라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라는 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의 글은 이분법이 배제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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