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3:25 (수)
국어의 모진 풍경
국어의 모진 풍경
  • 남기탁 강원대
  • 승인 2003.03.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學而思

요즘 ‘검사스럽다’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들은 여간 거북해하는게 아니다. 누군가는 대놓고 反駁하기까지 하니 그 불편한 심정이야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얼마전 마련된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회를 지켜본 시청자들 사이에서 형성된 말이다.

말이 만들어지는 데는 일정한 사회적 맥락이 있게 마련이니 ‘검사스럽다’는 말은 단연 계미년 새봄의 문턱에서 우리가 만나는 우리 사회의 을씨년스런 한 풍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모국어의 탄생과 형성, 발전 과정을 전공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세상살이에 조금 어둡다. 어두운 연구실에서 世事에 한 발 떨어져 눈망울 초롱한 학생들과 지내는 나 같은 교수, 그것도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맑은 공기에 흠뻑 취하면서 가끔 서울로 올라가는 교육공무원의 처지는 세상 일에 가급적 눈돌리지 않고 내 갈 길만 제대로 가면 된다는 생각을 키우게 한다. 동료 선생들도 그런 눈치다.

사실 이런 눈치는 정확히 말하자면 배외자의 어설픈 눈치가 아니다. 할 말 있어도 꾹 눌러서 한 번 더 참는, 그래서 언젠가 그 날이 오면 주위 살피지 않고 깜냥껏 외쳐댈 수 있는 그런 경우를 가리키는 눈치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게다.

말은 규칙을 지닌 과학이다. ‘아’와 ‘어’의 음가가 다르고, ‘ㄱ’과 ‘ㅋ’ 또한 전혀 같을 수 없다. 명확해야 하고, 투명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혼탁하면 이런 말들의 규칙은 언어학자의 손을 벗어나, 言衆들에 의해 마음껏 유린된다. 언중들의 말과 말들이 서로 뒤엉켜 또 다른 말들의 탄생을 자극할 수도 있고, 그 결과가 허망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말과 언어는 한 사회를 유지하는 망과도 같다고 할까. 사회를 유지하는 망이란 법이다. 법은 한자로 ‘法’이라고 쓰지 않는가. ‘물’[水]과 ‘가다’[去]가 서로 뒤엉킨 이 말은 축자적 의미 그대로 ‘물이 흘러 간다’를 말하리라. 정치나 도와 같은 것이 모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태와 관련됨을 지적한 것은 저 오랜 고전의 지혜였다. 법 역시 그러하다. 어떤 자연스러운 상태 혹은 그런 상태를 향해서 흘러가게 하는 것. 그런데 묘하게도 ‘去’에는 또 이런 뜻도 담겨 있으니, 그것은 곧 “떠나다, 잃다, 잃어버리다, 배반하다”라는 의미다.

법이 의미론적 태생에서 이러하다면, 이미 그 구성 면에서 자연스러움과 인위적인 부분이 충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법의 규율자인 ‘검사’들의 항명을 지켜보면서 씁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위임받은 힘의 근원지에 생각이 미처서다. 끊임없이 국민으로부터 떠나려는, 배반하려는 법을 팽팽하게 균형잡는 역할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교수들의 교수법이나 공부, 학자로 살아가기 이 모든 것도 자주 충돌한다. 거기엔 해야만 하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벗어나려는, 배반하려는 요소가 언제나 상존해 있다. ‘겸허’와 ‘성찰’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인문대 3층의 햇살 좋은 봄날, 한줌 한줌 스며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에 취해 국어의 풍경에 젖어들 때마다 사실 나는 세상사로부터 초연한 척 하면서도 그만큼 세상사에 뛰어들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敎學相長’이라는 말처럼, 나는 연구실에서 혹은 복도에서, 아니면 구내 식당에서, 그것도 아니면 강의가 끝난 어느 한적한 오후 햇살에 취해 학생들과 벌이는 작은 술판에서나, 함께 성숙해가는 삶에 대해 끈을 놓고 있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검사스럽다’라는 국어의 모진 풍경 앞에서 잠시 주춤거린다. 서슬퍼런 ‘檢亂’의 현대 정치사가 언뜻 스쳐간다. 겸허와 성찰을 동반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힘이란 무얼까. 학문이란 것도 이 물음 앞에서 주춤거리는 춘천의 오후. 부신 햇살이 한순간 새로운 세상을 열어 젖힐 때, 세상의 무수한 ‘권력’이 낮은 평등을 향해 포복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남기탁 강원대·국어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