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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한 自愧와 싸우기
철학에 대한 自愧와 싸우기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3.03.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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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김진석
인하대·철학

몇년 전부터 한국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학생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있는 대학에서도 올해 철학과에 진입한 학생 중 1 지망으로 철학을 지원한 학생은 한 명도 없고, 모두 2, 3, 4, 5지망으로 10명 남짓 들어왔으니, 이들 모두 ‘어쩔 수 없이’ 들어온 셈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크고 가까운 이유는 학부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대학은 학부제 논의가 시작된 이후 매년(!) 본부의 주관 아래 기형적으로 학부제를 뜯어고치는 과정을 겪은 후, 이년 전부터는 전체 문과대학을 하나의 인문학부로 통합하여 신입생을 뽑는다. 이러다 보니 철학과는 학생들이 가장 오고 싶어하지 않는 학과로 전락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정말 세상살이의 만만치 않은 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 우리 과에서도 나이든 분들은 처음부터 학부제를 매우 걱정하는 편이었는데, 오히려 정말 걱정해야 할 나이 적게 든 사람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취업에도 도움이 안 되는 등 여러 이유로 학생들이 오기 싫어하는 일반적인 세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심정이 한편에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소수일망정 들어오고 싶은 사람만이라도 들어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심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1지망으로 선택하는 학생이 겨우 한 명이거나 심지어 한 명도 없는 상황이 작년에 이어 계속되고, 또 학생들도 이제는 과거처럼 그저 졸업장을 바라보고 다니지 않고 상당수가 전과 등의 방법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제 처음엔 담담했던 젊은 교수들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고민은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 차원을 벗어난다. 기껏해야 차선으로 들어온 채 전과하지는 않고 그냥 다니는 학생들이 대다수인 상태에서 어떻게 철학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난감한 문제에 맞닥뜨린 철학 선생의 존재란!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강의 시간에 들어가면 학생들에게 정말 철학이 안 맞으면 빨리 가고 싶은 학과로 가도록 각자 노력하라는 권고하는 버릇이 생겼다. 철학에 대해 제대로 된 강의법과 원칙을 고민하기 어려운 판이 돼버린 셈이다.
철학이 스스로 무너지면서 철학 선생은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철학이 自塊하면서 철학자도 自愧하는 형국인 셈. 물론 철학 자체가 실용성을 잃어버리게 된 복잡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있고, 또 그 상황에서 철학 교수들도 시대에 걸맞은 철학을 만들어내지 못한 책임을 크게 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때때로 세상에 대해 “그래, 철학이 한 번 망가지도록 해봐라,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분노가 가슴속을 슬그머니 휘젓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분노는 세상에 대한 냉소로 기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철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에는 일차적으로 한국 철학계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비록 철학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철학을 전공하면 ‘마땅히’ 교수가 돼야 한다는 망상 혹은 강박이 몇 십 년 동안 대학에 알게 모르게 무겁게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교사도 배출하고, 다른 사회적 지식과의 연계 속에서 철학을 살려나가는 방법을 일찍이 찾았어야 하는데 아뿔싸, 이제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이제라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며 싸우고 또 싸우자, 라는 복잡한 심사를 안고 강의실로 들어서곤 하는 게 요즈음의 나다.
이래서 요즘의 내 철학 강의는 철학에 대한 자괴와 싸움하는 철학 사이에 걸쳐져 있다고나 할까. 때로는 형편없이 축 늘어지기도 하지만, 나는 이 줄을 팽팽하게, 탱탱하게 당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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