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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고전의 향기
  • 김욱동 서강대
  • 승인 2003.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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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김욱동
서강대·영문학


19세기 말엽에 활약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고전 작품을 두고 “사람들이 칭찬을 늘어놓으면서도 막상 읽지 않은 책”이라고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트웨인 특유의 유머와 기지가 마치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는 말이다. 그의 경구가 흔히 그러하듯이 이 말에도 의표를 찌르는 데가 있다.
그렇다. 실제로 고전으로 존중받는 작품 치고 막상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봤느냐고 물어 보면 얼버무리거나 아예 고개를 내젓기 일쑤이다.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아직 읽지 못했다든지, ‘전쟁’은 읽었는데 ‘평화’는 아직 읽지 못했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고 보면 트웨인의 말이 그렇게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최근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말이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뭇 지식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고전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느 책이 고전이고 어느 책이 고전이 아닌가 하는 것은 어떤 본질적 가치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요즈음 正典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적잖이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교과서의 내용을 개편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고전의 여부를 가리는 데에는 한 가지 시금석이 있다. 좀처럼 세월의 풍화작용을 받지 않는 작품은 일단 고전의 테두리에 들어간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뭇 사람들에게 여전히 사랑 받고 있는 작품, 새로운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를 주고 있는 작품은 ‘고전’으로 불러 크게 틀리지 않다. 특히 고전 작품은 마치 클래식 음악과 같아서 한번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더 감칠맛을 느낄 수 있는 고전 음악처럼 고전 작품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더더욱 새롭다.
우리 선조는 일찍이 책 속에 보물이 들어 있다고 가르쳤다. 일생 동안 무려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도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눈병이 난다고 하지 않고 왜 하필이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말하는지 궁금해 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불과 몇 백여 년 전만 해도 눈으로 조용히 읽는 묵독보다는 입으로 큰소리를 내어 읽는 음독이 널리 유행했다. 오늘날처럼 지식과 정보의 양이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텍스트를 모두 외워 버렸다. 현대 독자들이 텍스트라는 수박의 겉껍질만 핥고 있다면, 우리 선조는 수박을 통째로 삼키려고 했던 것이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영상-전자 매체의 위력에 눌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좀처럼 책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힘들여 책을 읽는 대신 비디오나 영화로 가볍게 때우려고 한다. 이러한 추세라면 앞으로 책이 없어지게 될 날도 멀지 않다고 내다보는 학자들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지나친 속단이다. 책의 성격이 달라질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책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책은 그 기능과 효과에서 영상-전자 매체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현란한 이미지가 일회적이라면 활자 매체를 통하여 얻는 정보는 영구적이다. ‘육체의 눈’으로 얻는 정보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얻는 정보는 더더욱 중요하다. ‘정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고전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책은 정보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닌다.
굳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지 않고 문명이나 문화의 집은 고전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것과 다름없다. 주춧돌 없는 집을 상상할 수 없듯이 고전이 없는 서양 문명과 문화는 생각할 수도 없다. 오늘날처럼 현란한 이미지에 눌려 활자 매체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지금 고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짚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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