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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산책 -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지음, 한길사 刊)
책산책 -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지음, 한길사 刊)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3.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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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이성의 자기반성의 산물

대구지하철 사고는 비극이었다. 고통의 생중계 앞에서 현대인들의 작태는 눈꼴사나웠다. 몇몇을 희생양으로 삼아 고장난 자본주의를 재가동하려는 전형적인 근대인의 행태 속에서 이 엄청난 사건은 다시 레테를 건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외면한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부재한 현실에서 올 초 나온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는 나름의 위로가 된다.

이 책은 슬픔에 관한 책이다. 비극과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를 통해 슬픔과 고통의 본질을 통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비극이라면, 문학가들이 당대의 비극적 삶을 형상화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정은 다르다. 소포클레스나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이들이 활약한 이 시기는 그리스가 정치적으로 가장 번영한 때였고,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이 팽배한 시기였다. 한마디로 호시절이었다. 이런 상황과 비극예술의 일상화가 공존했다는 건, 합격장을 받은 고시생이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떠올리는 것처럼 어색하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리스 예술의 토대가 정치적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 비극의 에토스가 자유의 이념, 정확히 말하면 종교적 자유도, 철학적 자유도 아닌 정치적 자유, 즉 시민적 자유의 이념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정치의 본질이란 게 그리스적인 것을 통해 볼 때 인간들간의 소통이고, 그런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남을 가능케하는 것이 슬픔의 교감이고, 슬픔의 교감은 고통을 깊숙히 경험한다는 것에서 가능하며, 고통의 깊숙한 경험은 감정적인 젖어듦이 아니라 그것을 이성적으로 인지한다는 데 있으며, 주인공의 적극적 행동이 불행의 씨앗이 되는 그리스 비극은 인간 외부가 아닌 내부의, 삶의 원리로서의 슬픔과 고통을 바라보게 해주는, 그리스적 유토피아의 거름 같은 것이었다는 게 저자의 전언이다.

이 책의 성찰이 현대적 비극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시절의 정치와 민중의 행복한 삶이 고통과 슬픔을 직시해서 가능해졌듯이, 오늘날의 지속가능한 삶도 내부의 계기들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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