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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연속인터뷰-그가 남긴 자리(2) : ‘녹색연합’ 상임대표 박영신 전 연세대 교수(사회학)
신년연속인터뷰-그가 남긴 자리(2) : ‘녹색연합’ 상임대표 박영신 전 연세대 교수(사회학)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3.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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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영혼을 위해 존재하는 것”…한 공동체주의자의 아름다운 묵상

 

 

 

 

 

 

 

처음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박영신 교수는 “내가 한일이 뭐가 있냐”라며 거절의 뜻을 표했다. 계간지 ‘현상과인식’의 대표로, 녹색연합의 상임대표로, 또 최근에는 노인시민연대를 만들어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가까스로 설득해 지난달 28일 일산의 한 커피숍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퇴임하신 후 근황이 궁금합니다.
“신촌 생활을 접고 일산으로 옮긴지 이제 꼭 두 달이 됐다.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유학시절을 빼고 나면 거의 평생을 신촌 근처에서 살았다. 땅을 밟고 싶은 마음에 아파트 1층을 구했고, 서울로 가끔 나가는 것 빼면 거의 대부분을 일산에서 보내고 있다.”
△2000년부터 녹색연합의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활동으로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졌다고 생각됩니다.
“원래 나서서 행동하는 편은 아니었다. 운동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문익환 목사의 여동생과 결혼한 까닭에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니, 형사들이 주변에 항상 맴돌았다.(웃음) 그러니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곤란했고, 또 시대가 그렇다고 해서 전부 바깥으로 나가 활동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유신 절정에 한국에 돌아왔던 이유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성의 차원에서 격려하고 자극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헌법 개정, 총장직선제 건의 정도에서 나섰을까 외부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시민·환경·여성 운동 등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소개를 하고, 그러다가 녹색연합에서 공동대표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고민 끝에 승낙을 했는데, 며칠 뒤에 상임대표가 돼 달라는 연락을 다시 받았다. 그때는 마지못해 승낙을 했지만, 지금은 녹색연합의 활동에 의미를 두고 있다. ‘환경’이라고 하면, 내 주변의 것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녹색’ 이러면 인간의 문제, 문명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 같다. 다행히 녹색연합도 생명운동이라는 기조를 걸고 있어,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 같다.”
△대학생들의 고전 읽기 연합 세미나 ‘작은 대학’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작은 대학은 대학에 대한 비판,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다. 10년 전에도 우리의 대학은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취직 공부 때문에 도서관의 불이 환했고, 경찰이 학생들의 가방을 뒤져도 학생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이런 대학이라면 학원비 내고 취직공부 하면 되지, 좋은 선생이 왜 필요하며 좋은 학생들을 골라서 대학에 입학시킬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삶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길 18~19살의 학생들을 받아다가 이 학생들의 꿈을 죽이고 왜곡시키는…우리가 그런 노릇을 하고 있다. 대학의 기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의 유산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생각하고 말할 기회를 만들었다. 부족한 대로 이끌어 온 지 10년이 넘었다.
작년에 ‘정복자와 노예’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여기서 정복자는 경제주의이다. 이제는 대학도 경제주의에 정복된 노예에 다름 아니다. 대학 총장들이 선거에 나와서 하는 말은 더 많은 모금을 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능력 있는 총장이라고 투표를 한다. 얼마나 무서운 발상인가.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학은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수는 명예나 권력, 사회적인 대우 같은 것과 상관없이 자기 연구를 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가르치고 이것 때문에 학생들이 들어오는 곳에서 학문이 되고, 인류의 유산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돈이 없어도, 크지 않아도 된다. 왜 모든 대학이 같은 줄을 서서 가야하는지, 교육부의 방침을 그대로 따라가는지, 배짱 있게 지원금을 거부하고 대학의 이상을 쫓을 수는 없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 아이비리그의 첫 흑인 여자 총장, 루스 시몬스가 취임식에서 “대학의 존재이유는 직장을 구해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은 영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미국대학을 좇아서 개혁한다고 하지만, 아이비리그 총장도 이런 말을 한다. 모든 대학이 다 이럴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고민할 만한 대학들이 먼저 나서서 경영형 총장을 내세우니 안타깝다.”
△녹색연합이나 대학에 대한 생각 모두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회학뿐만 아니라 학문 전반에 개인을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저변에 깔려있다. 경제학이 바라보는 인간상, 세계관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학의 출발은 이것이 아니다. 고전이론을 공부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회학은 개인을 넘어서는, 흩어져 있는 개인을 엮어주는 단위에 대한 연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자체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국내의 사회학자들은 공동체주의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회학이 협소하다는 사실 뿐 아니라, 사회학의 기본적인 방향성 설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 이 세계, 이 삶이 정말 개인 단위로 정당한 삶을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사회학을 새롭게 새워야겠다고 생각했고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사회학자로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자신의 학문에 대한 공과를 매기신다면.
“나는 사회학의 이론과 한국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현실에 양쪽에 다 관심이 있었다. 그 이면에는 시민의 책임이나 시민다움에 대한 관심이, 더 소급해 나간다면 도덕성에 대한 관심과 닿아 있을 것이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회학이었다.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든 또는 모두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따라가도 그것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학문 말이다. ‘현상과인식’이라는 순수학술계간지를 만든 것, 또 지금 참여하고 있는 시민운동도 사실은 모두 같은 맥락에 있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대학 안에 있었고, 그 속에서 작은 목소리를 낸 존재이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오히려 소수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지식인들의 과제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예전에 박정희 퇴진 운동을 벌이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물었던 말은 “박정희가 물러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박정희의 어떤 점을 비판하느냐”였다. 박정희의 독선인지, 비민주성인지 그 대상을 분명히 해야 독선적인 대학, 독선적인 기관에 대한 비판도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인물, 단체 중심의 비판을 했을 뿐, 객관적인 비판을 하지 못해왔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원칙의 수준에서 고민하고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대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대학 밖의 것을 비판한다. 학연, 혈연 중심의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비합리적이고 원칙 없는 구조들을 비난한다. 그런데 실제로 대학에서도 그와 같은 모순들이 그대로 존재한다. 서울대에는 서울대 출신이, 연세대에는 연세대 출신이 교수가 된다. 대학의 방향에 대한 고민 없이 CEO총장을 뽑는 것이 현실이다. 이래서는 비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녹색연합도 마찬가지다. 활동이 많아지니 상근직원을 늘이면서 규모를 키워나가려고 한다. 또 자신들이 운동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밖으로는 팽창주의, 대기업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그 방식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비판을 할 때는 원칙을 가지고 그 원칙을 자신에게도 적용시키는 것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기준이야말로 학계가 세워야 할 것이 아닐까.”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지금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활동들 계속하고, 그간에 썼던 글들을 모아 출판할 예정이다. 그리고 아직 건강하니 공부도 계속해야 되고, 교회운영도 계속해야 한다. 2001년 10월 말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래 목사가 될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가 사회학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었다. 유학시절에 알고 지내던, 노벨상을 타면 이 사람이 타겠다고 생각했던 동료가 목사가 됐다. 영구귀국해서 목회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 친구와 작고 특별한 교회를 만들기로 했다. 초교파이며 지금 나를 포함해 4명의 목사들이 돌아가며 설교를 한다. 교회의 크기를 넓히는 대신 작고 당찬 교회, 그리고 내부에만 머무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밖으로 넓혀 나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박영신 교수가 걸어온 길
1938년2월,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페스탈로치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페스탈로치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을 다짐했다. 목사가 돼 신앙과 교육을 실천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1960년 연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장교로 군복무 후 1966년 연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으나, 페스탈로치가 되기에는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때 의대에 재학 중이던 아내 문은희를 만났다. 예일대에서 종교학과 사회학 과정을 공부하다 점점 사회학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결국 캘리포니아 주립대(버클리)에서 사회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 시절에 공부하는 진짜 재미를 맛보았다.
1975년 연세대 사회학과 부교수로 임용됐다. 1977년 학술계간지 ‘현상과 인식’ 동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최초의 전문학술지였다. 이때 무사히 출간된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도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 중 가장 의미 있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1983년에는 한국사회이론학회의 초대회장을, 1997년에는 한국사회운동학회 초대회장을, 1998년에는 한국인문사회과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84년과 1992년 각각 버클리에 있는 연합신학대학원과 한국총신대에서 신학과정을 끝냈다. 1992년에는 대학생 연합 고전읽기 세미나 ‘작은대학’을 열었다. 대학의 숨통을 틔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1년 목사안수를 받고 양재동에 ‘예람(예수의 사람) 교회’를 열었다. 나이 60을 넘겨 소년 시절의 꿈을 이루게 됐다.
현재에는 녹색연합 상임대표와 노인시민연대 공동대표, 그리고 녹색서울시민위원회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 사회의 구조와 이론’(일지사, 1978), ‘변동의 사회학’(학문과사상사, 1980). ‘역사와 사회 변동’(민영사/한국사회학연구소, 1987), ‘사회학 이론과 현실 인식’(민영사, 1992), ‘동유럽의 개혁 운동: 폴란드와 헝가리의 비교’(집문당, 1993), ‘우리 사회의 성찰적 인식’(현상과인식, 1995), ‘새로쓴 변동의 사회학’(학문과사상사, 1996),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 바츨라브 하벨의 역사 참여’(연세대출판부, 2000), ‘겨레 학문의 선구자 외솔과 한결의 사상’ (연세대출판부, 200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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