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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진위논쟁 새국면…농업사학계는 사활건 학문대결
‘화랑세기’ 진위논쟁 새국면…농업사학계는 사활건 학문대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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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쟁 :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한국사학계

‘역사비평’ 봄호에 강단진 목소리들이 실렸다. 조용하기로 소문난 한국사학계 쪽에서 간만에 논쟁이 발생한 듯하다. 그런데 쟁점 주제들이, 해결 방향에 따라 그 파장이 만만찮을 굵직한 것들이라 새삼 주목을 요한다. 한 곳에서는 휴화산으로 잠자고 있던 ‘화랑세기 진위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다른 한 곳에는 여말선초 농업사 분야에서 권위자들이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고 있어 한동안 학계가 들썩거리리라 예상된다.

박창화 논문 발굴 둘러싼 진본설-위작설 재대결

▲이영훈 교수 /
먼저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는 ‘화랑세기’ 쪽을 들여다보자. 박환무 숭실대 강사가 일본잡지 ‘중앙사단’을 뒤지다가 우연찮게 발굴한 논문을 게재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다. ‘신라사에 대하여’란 글인데, ‘화랑세기’ 필사자로 알려진 박창화가 1927년에 쓴 글이다. 이를 두고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와 윤선태 충남대 교수가 각각 진본설과 위작설을 강화시키는 글을 발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진본설의 요지는 이렇다. 앞의 논문에서 박창화가 신라사상의 주축으로 ‘神道’를 지목하는 점, 신라 실성왕비를 ‘삼국유사’에 기재된 ‘阿留夫人’이라 하지 않고 ‘화랑세기’에만 보이는 표기인 ‘內留夫人’이라 칭한 것은, 그가 ‘화랑세기’를 봤다는 증거이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토대로 해서는 도저히 창작해낼 수 없는 부분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현전 필사본 ‘화랑세기’는 신라 왕족의 복잡한 혈연관계를 기술한 책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을뿐더러 그 묘사가 실로 생동감이 넘쳐서 위작자들도 “박창화는 천재”라고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에 필적할만한 지식을 지녔어도, 꾸며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게 이번 진본설의 요지다. 반면 박창화의 논문과 김 기자의 글을 검토한 윤선태 교수의 논평문은 이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윤 교수는 “내류는 후대의 누군가가 ‘삼국유사’의 ‘阿留’를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다”면서 결국 이 논문에서 드러난 박창화의 박람강기한 역사교양으로 미뤄볼 때, ‘화랑세기’는 정사를 통해 추론해낸 위작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보여줬다. 아울러 윤 교수는 ‘화랑세기’에 씌어진 문투가 박창화가 유품으로 남긴 기타 역사창작물과 비슷하다며 이 부분에 대해 한학자들의 시급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사)가 ‘역사학보’ 176집에 발

▲이태진 교수 /
표한 ‘화랑세기에서의 奴와 婢-삼국시대 신분제 재론’이라는 글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난 노와 비는 조선시대 이래 우리에게 익숙한 賤民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를 20세기의 어떤 누군가가 창작해 낼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여 지적하기도 싱거울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해 ‘화랑세기’ 진위논쟁은 앞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박창화의 논문이 발표된 시기가 1927년인 것은, 국문학계에서 향가에 대한 첫 해독이 이뤄진 1929년 이전인지라, 진본설자들은 박창화가 향찰의 문법구성과 논리에도 도통해 그걸 지어냈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국어학계의 참여가 이뤄지면 어느 정도의 해결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즉, ‘화랑세기’에 실린 향가가 양주동이나 오구라 신페이가 보여준 문법논리와 일치하느냐, 아니면 그와는 다른 신라시대의 향찰문법을 보여주느냐를 밝히면 되는데, 만약 후자인 것으로 연구결과가 나올 경우 국문학계와 사학계는 걷잡을 수 없는 논란의 도가니 속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농업사 분야에서는 논쟁이 뜨겁다. 지난 ‘역사비평’ 겨울호에 이태진 서울대 교수의 저술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태학사 刊)에 대한 서평이 실렸는데, 여기서 3명의 필자가 나서서 집중적으로 비판적 문제제기를 했고, 이 교수가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 글을 이번 봄호에 게재한 것이다.

▲이호철 교수 /
한명의 저자에게 세명의 평자가 달려붙었지만, 가장 심각한 곳은 농업사 전반에 대해 의견대립을 보여주고 있는 ‘이호철-이태진’ 대국이다. 이태진 교수는 저서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의 농업사를 15~16세기에 이뤄진 저습지 개간과 수전농업의 확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런 수전중심의 농업기술 발달이 사림세력과 사회발달의 기저로 작용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 교수는 유아사망률 감소로 인한 조선전기 인구의 대폭증가와 농업발달을, 그리고 그런 인구증가의 원인으로 의술발달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가설을 제기했다.

중진 역사학자 40년 연구성과 도마 올라

하지만 이호철 경북대 교수의 서평은 이런 이태진 교수의 논의가 갖는 사

▲역사비평 /
료해석 편협함과 부정확함, 실증분석 없이 개연성에 의존한 진술, 통계모델의 불성실함을 비판하며, 나아가 이 교수가 “밭농사와 논농사가 상호적으로 발전해온 조선농업사를 논농사 위주로만 살피고, 농업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확보된 불완전한 학설을 사회사상사 및 의학사의 동력이나 결과로 연결시키고 있어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치명적인 비판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이호철 교수가 지나친 혹평을 하고 있다”며 “나는 농업기술 전문사가도 아니요, 농학도도 아니다. 다만 농업기술의 변천이 역사변동에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관심으로 문헌기록을 정리해 대세를 읽은 따름”이라고 반론했다.

이 논쟁은 자연연령으로 볼 때 선후배 간 봐주기 없는 논전이라는 점에서 일단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증적 엄밀함을 추구하는 세부전공자와 다방면을 아우르는 거시적 작업자(이호철 교수는 농업사학회 회장이고, 이태진 교수는 역사학회 회장이다) 사이에서 이뤄진 대화라는 점에서 역사학 방법론을 성찰하고 그 주류를 결정짓는 대결로도 비춰지는 측면이 있다. 앞으로 이호철 교수의 반론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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